희망이네 분식집 2층,
대박이는 또 꿈을 꾸는지 잠들어 있었고 주방이 딸린 거실엔 남자와 여자가 탁자를 마주해 얘길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간병인인 여인이었고 남자는 홍 씨라 불린 남자였다.
“대박이에게 할아버지 얘길 하는 것이 좋겠어요.”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긴 얘길 해야지요. 하지만 걱정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박이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오늘은 할아버지 얘길 안 했어요. 그러니 할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대도 대박이는 받아들일 거예요.”
“아직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충격을 줄까 봐서 그렇습니다. 이참에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받아보는 것도 좋겠는데,”
사실 대박이는 팔과 다리는 조금씩 움직였지만 일어나 앉지는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정신은 말짱해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 가자는 말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면 홍씨가 검진을 받아보자고 말해보세요.”
“이번엔 억지로라도 검사를 받게 해야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살살 달래시는 게 좋겠어요.”
여인이 정색했다.
“좋아요. 안 여사님 말대로 살살 달래 봅시다. 그래도 안 되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솔직히 말합시다. 그나저나 그동안 안 여사님이 고생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얘길 하겠지만 어르신이 남긴 유언장이 있습니다. 안 여사님 얘기도 썼다니까 대박이가 일어나면 그때 함께 뜯어보도록 합시다.”
홍씨는 진지하게 말했다.
홍씨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지 7일이 지나고 있었다. 홍씨는 대박이가 깨어난 것에 하늘에 감사했다. 하지만 손자가 깨어난 날, 어르신이 자살했다는 것에 마음이 쓰였고, 의문이었다. 어쨌든 홍 씨와 안 여사는 할아버지에 대해 거짓말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었다. 이젠 진실을 말해줄 때가 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으, 나 난 정의의 사자가 될 겁니다.’
홍씨와 안 여사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대박이는 끔찍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누구도 내 의지를 꺾을 순 없다.’
버둥버둥, 버둥버둥
‘으으으 할아버지와 약속을 했다니 까!’!’
악몽을 꾸는 것일까, 대박이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 꿈속의 대박이는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인 자갈밭을 걷고 있다. 칼에 난도질을 당했는지 옷은 너덜거렸으며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바위 위에서 괴인인 적발 노인과 실랑이를 벌였었다. 적발 노인은 온갖 감언이설로 대박이에게 자신의 제자가 되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대박이는 단호히 거절했다. 죽음이라는 공포 속에서도 대박이는 불의에 맞섰던 것이었다.
으 아아아악,
생각만 해도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대박이는 적발 노인의 가벼운 손짓에 칼바위에서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졌었다.
‘네놈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악마가 되어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게 될 것이다. 크크’
대박이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적발 노인의 악다구니였다.
그런데도 대박이는 심기를 굳건히 했다.
‘어떠한 상황에 임하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
대박이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상기했고 말씀에 따랐다.
왜?
왜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대박이는 알고 싶었다. 괴인인 적발 노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고통과 모욕뿐이었다.
적발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는 시늉만 해도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만큼 적발 노인은 말 그대로 공포의 괴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한 번씩 심장이 화끈거리면 적발 노인은 물론이고 그 어떤 공포심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것도 적발 노인의 주특기인 공포의 협박과 무력을 사용할 때도 심장은 화끈거렸고, 괴수에게 쫓길 때도 그런 증상을 느꼈었다. 위기와 공포심이 들 때는 더욱 거센 화끈거림을 받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벌써 저승에 갔던지 기절을 수십 번도 더 했을 것이었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말씀만 가지고는 괴인의 공포심을 이겨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왜, 심장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 걸까?’
대박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여기는 사막인데, 이런 사막도 있었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자갈밭,
대박이는 비틀거리며 자갈밭을 걸었다.
목이 말랐다.
숨이 턱 막혔다.
아른아른 눈앞이 아른거렸다.
오아시스처럼 보였던 것은 환영일 뿐이었다.
몸에선 땀인지 핏물인지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에 보이는 것은 열기가 올라오는 자갈밭뿐이다.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한 걸음걸이다.
이젠 땀도 말랐는지 입술이 갈라졌다.
‘또 화끈거리네, 그럼 이 고통도 이겨낼 수 있을까,’
몸에 났던 상처까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쩍쩍 갈라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곧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대박이는 어금니를 깨물며 참아냈다.
‘내가 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그래 이겨낼 수 있어,’
대박은 지금의 절박함과 위기 때마다 도움이 되었던 심장의 화끈거림을 믿었다.
“으, 난 정의의 사자라니까 요.”
“세상이 네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이다.”
언제 나타났는지 자갈밭에 쓰러진 대박이 앞에 물통을 든 적발 노인이 서 있었다. 적발 노인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면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것도 철철 흘리면서...
“저는 으...”
“이놈아, 네놈이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죽으면 끝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겠다고 약속만 해라, 그러면 너에게 큰 힘을 줄 것이다.”
“으 물...”
“그래 여기 물이다. 약속만 하면 물도 주고...”
“나 난 불의완 타 협 안 해요.”
“그래도 이놈이, 크아아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적발 노인이 괴성을 질러댔다.
으으으,
고막이 터지는 고통에 절로 신음하는 대박이었다.
“아니, 이 신음은 뭐지, 아직도 젊은이가 놈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건가, 이를 어찌한다.”
대박이가 고통에 신음하는 그때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삿갓 노인이 길 건너편에서 희망이네 분식집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한 번씩 귀를 쫑긋거리며 인상을 쓰긴 했지만, 인자한 모습에 선한 눈빛의 노인이었다.
“제발 마성을 두려워하지 마라, 악은 공포심을 일으켜 악에 빠져들게 만들기도 한단다. 네가 연자라면 내가 지켜줄 것이다. 이러다가 악이 득세하는 시기를 맞이하는 것은 아니겠지,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순간 삿갓 노인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으으으
한차례 몸부림을 친 대박이가 눈을 떴다.
이마엔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흥건했다.
“또 악몽을 꾼 게냐?”
홍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러게요, 또 악몽을 꾸었네요.”
힘없는 목소리가 대박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쩌누, 악몽은 몸에도 안 좋은데, 이 식은땀 좀 봐,”
안 여사의 말속에 측은지심이 담겼다.
식은땀을 닦는 안 여사의 손길도 정성이 가득하다.
----------계속
오늘도 힘차게 출발하세요.
'악마와 거래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마와 거래했다. 9 (2) | 2021.09.23 |
---|---|
악마와 거래했다 8 (2) | 2021.09.19 |
악마와 거래했다. 6 (6) | 2021.09.15 |
악마와 거래했다. 5 (10) | 2021.09.13 |
악마와 거래했다. 4 (0) | 2021.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