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만리(有情萬里)

단야의 유정만리 2권 4화

썬라이즈 2023. 9. 5. 04:27
728x90
반응형

728x90

 

2, 가깝고도 먼 이별

 

 

 

천지봉 일대가 생기로 넘쳐났다.

땅속에서 꿈틀대던 생명들은 기지개를 켜대며 밝은 세상을 먼저 보려고 아우성을 쳤고, 이미 밝은 세상으로 나온 생명들은 따듯한 일광욕을 즐겼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고송 하며 온갖 나무들이 활개를 쳤다. 철쭉은 자랑하듯 붉은 꽃잎을 피워 물고 진달래를 건네다 보고, 분홍꽃망울을 송송히 매달은 진달래는 게눈 뜨고 눈을 흘긴다.

 

촉촉이 젖은 능선은 불꽃처럼 철쭉꽃이 지천이다.

황의를 입은 한 젊은이가 철쭉꽃 사이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젊은이의 허리엔 손도끼가 매달려 있었고 눈엔 깊은 상념이 어렸다.

 

소연아! 넌 지금 어디 있니? 이제야 너를 찾아 나섰다. 정말 미안하다. 소연아!”

무룡은 능선에 올라서더니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 하루 동안 깊은 잠에 삐졌던 무룡이 눈을 떴을 때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들창으로 몰려들 때였다. 이미 봄비는 그쳐 있었고 날씨는 청명했다.

 

무룡은 아버지가 아침이라고 준비한 꿩탕을 그것도 두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옛날에 먹었던 설삼(雪蔘)은 아니지만, 만복철이 캐다 놨던 백 년은 족히 된 산삼이 다섯 뿌리나 들어간 꿩탕이었다.

 

무룡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섰다.

소연도 빨리 찾아야 하고, 만화곡에 들려 그간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볼 생각에서였다. 사실 마음만 급했지 소연이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특별한 대책도 없었다. 무룡은 만 가지 생각을 접고 빠른 걸음으로 한 능선을 넘었다. 사람 기척에 놀랐는지, 발가벗은 상수리나무들이 부끄러운 듯 지나가는 봄바람을 붙잡고 떨어댔다.

 

이 참나무 숲만 지나면 바로 만화곡 입군데, 아무래도 조심을 해야겠지,”

무룡은 주위를 세세히 살펴 가며 걸음을 빨리했다.

 

, 저 소린...?’

무룡은 빠른 걸음을 멈추며 민첩하게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숨도 멈췄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 한다는 것쯤은 터득했기에 몸을 숨긴 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흑의 인들이 떠들며 나타났다. 그들은 분명 만화곡에서 나오는 중일 것이었다. 사나이들은 무룡이 숨어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왔다. 10, 9, 8, 7, 그렇게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무룡의 몸 집에 비해 바위는 작았다.

바위 뒤에 납작 웅크리고 있기는 했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황의자락이 드러나 있었다. 사나이들이 이대로 지나간다면 들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무룡은 들키더라도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빨을 꽉 깨물은 무룡은 놈들을 주시한 채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7장에서 6, 5, 4,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사나이들이 4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걸어오던 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잔뜩 긴장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던 무룡이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잘못했으면 사나이들에게 들킬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아마도 사나이들이 긴장한 상태였다면 작은 숨소리라도 낌새를 알아챘을 것이다.

 

어떤 놈이 늙은이의 시신을? 여봐라! 분명 관련이 있는 자가 다녀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생각하니, 다시 내려가 잠복근무를 서는 것이 좋겠다. 잘못하면 공자께 경을 친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2! 네가 먼저 공자께 알려라! 어떤 놈이 다녀갔다고,”

그럼 대두(大頭)! 다녀오겠습니다.”

우린 다시 내려가자!”

 

- 휘익-

 

명령을 받은 자는 비호처럼 몸을 날려 무룡이 숨어있는 바위를 타 넘었다. 사나이는 그렇게 숲 속으로 사라졌다. 만약 놈이 서둘지만 않았어도 시선을 약간만 아래로 두었어도 무룡은 꼼짝없이 들켰을 것이다. 물론 사나이들이 곧바로 만화곡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역시 발각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

후 휴- 후휴--”

무룡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순간적으로 몸을 빼내 더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무룡의 몸놀림은 일류는 아니더라도 이류급 이상의 실력은 될 것 같았다.

 

대단한 놈들이다. 나 같은 실력으론 100명이 있다 해도 놈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 같다. 다행히 숨죽이는 법을 알았기에 살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놈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혹시 소연과 자영이를 잡으려고, 그렇다면 분명 소연과 자영은 살아있다는 얘기가 된다.”

무룡의 얼굴에 다소나마 안도감이 어렸다.

 

어쩐다. 놈들과 대적할 수도 없고, 소연과 자영은 분명 도망쳐 산을 벗어났을 거야, 소연아! 자영아! 나는 당분간 이곳에 올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너희들을 지켜줄 힘이 생기면 그때 다시 찾을게, 아니지, 놈들이 돌아가면 집으로 찾아오너라! 일단 나는 돌아간다. 소연아! 자영아! 제발 무사해야 한다.”

무룡의 얼굴에 분노(忿怒)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무룡은 놈들이 떠날 때까지 당분간은 만화곡을 찾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무룡의 마음이 편했겠는가, 무룡의 눈에선 분노가 이글거렸다. 생각 같아선 닥치는 대로 놈들을 척살하고 싶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무룡이었다.

“......”

무룡이 힘없이 발길을 돌리자, 처음부터 나뭇가지에 앉아 신기한 듯 무룡을 지켜보던 다람쥐가 나뭇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곤 무룡이가 숨어있던 바위 위로 올라가더니, 앞발을 비벼대며 무룡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다람쥐는 무룡이 무사하게 돌아가길 빌었던 모양이었다.

 

 

그 시각 천지봉 서북 쪽의 한 능선이 햇볕에 드러났다.

능선은 다른 곳보다 가파른 데다가 바위로 이루어진 능선이라 사람들이나 짐승들도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그 능선에서 천지봉 쪽으로는 수십 장 높이의 가파른 암벽들이 마치 병풍을 친 것처럼 늘어서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서북에서 서쪽 끝 암벽 앞이었다.

곰 한 마리가 어른거렸다.

암벽엔 곰의 잠자린지 동굴까지 뚫려있었다.

 

천지봉 골짜기 어딘가에 곰이 서식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곳 북쪽 능선에 곰이 산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분명 곰 한 마리가 암벽 밑에서 껑충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죽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껑충거린 것이 아니라, 춤을 추는지 미친년처럼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꼭 무당이 푸닥거리할 때 추는 그런 춤 같았다.

 

그만하고 들어오너라!”

동굴 안에서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요.”

여인이 춤동작을 멈추곤 동굴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동굴 안,

가죽옷을 입은 소연과 한철이 마주 앉았다.

 

소연아! 춤은 출 만하더냐?”

할아버지! 아니지, 사부님이 시키셔서 춤을 추기는 했지만, 무슨 무공인데 춤을 춰야만 배울 수가 있다는 거예요. 제자는 정말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연은 따지듯이 말했다.

 

네가 지금, 사부에게 따지는 것이냐?”

한철의 굵직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윙윙 울렸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는 하루빨리 무공을 익혀야 한다니까요!”

요것 봐라! 사부 앞에서 큰소리를 빽 질러,”

소연이 언성을 높이자, 한철도 엄하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사부님, 배우기 쉬운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소연이 저자세를 취했다.

 

좋다. 네가 정히 빨리 배우고 싶다면 이것을 주마! 읽어보고 네가 알아서 배워라! 알겠느냐?”

사부님! 그럼 저보고 혼자 배우라는 거예요,”

그래 독학을 해라! 나도 혼자 배웠느니...”

그럼 사부님은 이제부턴 제 사부님이 아니네요.”

, 뭐라! 사부가 아니다. 소연아! 한번 사부는 영원한 사부니라! 너같이 똑똑한 아이가 그런 것도 몰라서야 말이 되겠느냐!”

좋아요. 그럼 제가 무공을 익힐 때는 간섭하지 마세요. 아셨지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뭐냐? 골치 아프다. 빨리 말해라!”

그러니까, 사부님은 제가 무공을 익힐 때...”

뭔 소린지 듣기도 싫다. 자 이것이나 받아라! 네가 독학을 한다니, 마음대로 수련을 해 보거라

 

한철은 말을 뚝 자르더니 책 한 권을 소연 앞에 던졌다.

그리곤 가부좌를 튼 자세로 눈을 감았다.

 

드르렁, 드르렁,

 

요것아! 어디 한번 혼자서 잘해 보거라! 네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글 뜻이나 알려나 모르겠다. 나도 내용을 이해하고 익히는데 이 십 년이 걸렸다. 내가 이래 보여도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아이 시끄러워라, 좋아요. 일부러 코를 골아도 상관없어요. 내가 사부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드릴 거니까,’

“......”

소연은 책을 집어 들고는 등불 앞으로 다가갔다. 책은 두툼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가장자리는 너덜거렸고 표지의 글씨는 퇴색되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소연은 눈을 크게 뜨고 표지의 글을 읽었다.

 

천무신무 비록(天舞神巫秘錄), 흐릿했지만 표지엔 천무신무 비록이라 쓰여 있었다. 표지 글만 봐서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글의 뜻대로 풀이하면 하늘의 춤, 신의 춤, 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조것이 아무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 사부님! 잘못했어요. 앞으로 사부님이 시키는 대로 잘할게요. 아양을 떨어댈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네. 아무튼 네가 제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하루도 못 가서 아양을 떨게야, ,’

“......”

노인은 소연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소연은 이를 앙다물고 책을 펼쳤다.

 

연자(緣者)는 보아라!

천무신무 비록(天舞神巫秘錄)은 내 평생을 바쳐 창안한 무공이다. 비록(秘錄)을 얻는 자()! 일세를 풍미할 것이다.

 

처음부터 예사롭지가 않네.’

소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연자(緣者)!

예로부터 인간은 피조물로서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하늘의 조화에 인간은 한갓 티끌에 불과했느니라! 천둥이 치면 천둥소리에 놀라 살려달라고 빌었으며 번갯불엔 혼을 빼앗겼다. 이처럼 우매한 인간들은 우상을 숭배하여 신으로 모셨다. 하여 그 시절엔 신을 관장하는 주술사가 있었다. 그 주술사들의 후예가 바로 나다.

 

연자(緣者)!

나 또한 신을 모시는 무녀(巫女)였느니라!

나는 어느 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신무(神舞)를 출 때였다.

 

연자(緣者)!

만물의 조화는 귀일(歸一)한다고 하였다. 무(舞) 속에 그 이치가 담겨 있음을 깨닫고, 어떤 조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평생을 무(舞) 속에 살면서 연구했다. 그러길 수십 년, 나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무(舞) 속에도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연자(緣者)!

무(舞) 속에 천지를 뒤덮을 힘이 있다. 하늘의 무()이니라! 신명(神命)으로 무()를 익히면 손끝에서 바람이 일고 발끝에서 태산을 움직일 힘이 절로 솟을 것이다. 하늘을 날게 될 것이며 물 위를 걷게 될 것이다. 이는 가히 세상을 놀라게 할 무공이다. 뜻을 새겨 정진하길 바란다.

 

연자(緣者)!

연자가 여인이면 대성을 이룰 것이니 힘을 다하라!

그림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느니라!

내 평생의 천무신무 비록(天舞神巫秘錄)을 빛내 다오

 

월화신무(月花神巫)가 쓰다.

 

! 이런 기막힐 일이, 잘 알겠습니다. 소연, 월화신무님의 뜻을 받들 것입니다. 꼭 대성하여 천무신무비록을 빛낼 것입니다. 월화신무 님!’

 

소연은 한참 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를 대성하리라 다짐했다.

 

한철은 소연이의 책 읽는 모습을 처음부터 실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소연이 경악하듯 놀라는 것을 보고 움찔했지만 내색 없이 눈만 꿈벅 꿈벅거렸다.

 

요것 봐라! 제법인데, 하지만 그림을 보고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볼 것이다. 나한테 꼬치꼬치 캐묻기만 해 봐라!’!’

 

드르렁-드르렁-

한철은 정말 잠이 든 것 같았다.

 

----------계속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응형

 

^(^,

응원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긍정의 삶으로 파이팅!

충!

728x90
반응형

'유정만리(有情萬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야의 유정만리 2권 6화  (0) 2023.09.19
단야의 유정만리 2권 5화  (0) 2023.09.06
단야의 유정만리 2권 3화  (0) 2023.09.04
단야의 유정만리 2권 2화  (0) 2023.09.03
단야의 유정만리 2권 1화  (0) 202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