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동굴에 혼자 남은 소연은 멍한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헐렁한 가죽옷이 편해 보였지만, 아니 그냥 철퍼덕 주저앉아 있어도 무방할 터였다. 하지만 사회에 오염되지 않은 소연에게는 그마저도 무리였을 것이었다.
“누구--?”
소연은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바짝 긴장했다.
“토끼 간을 먹었느냐? 겁먹긴, 자 이것이나 손질해라!”
노인이 불쑥 들어서며 잿빛 토끼를 소연 앞으로 던졌다.
“아악!”
소연은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이런, 이런, 그래 가지고 무공을 익힐 수 있겠느냐? 무공을 가리켜 볼까 했더니, 그냥 시중이나 들어라! 그리고 이런 것 손질하는 것도 배워라! 음식은 네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노인은 토끼를 가리키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천태일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오던 길에 산토끼 한 마리를 잡긴 잡았다. 하지만 자신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잘하는 짓인지, 그에 따른 결론도 못 내린 채 천태일 일행을 살피느라 종일 생고생을 해야 했다. 그랬으니 짜증이 나도 많이 났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 가신 일은 어떻게 되었어요, 놈들이 아직 거기에 있던가요. 저희 할아버지와 자영이는 무사하지요.”
소연은 숨도 안 쉬고 질문을 해댔다.
“숨 막힐라! 쯧쯧, 말도 말거라! 오늘 놈들의 동태를 살피느라 십 년은 더 늙었을 것이다. 허니, 앞으론 정성을 다해 이 할아비 시중을 들어야 할 것이야!”
“누가 그런 얘기 듣겠대요, 어찌 됐냐고 물었잖아요!”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못된 것 성깔하고는, 알았다. 좀 앉아서 얘기하자.”
한철은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소연에게 들려줬다. 그러나 초막이 불탔다는 얘기와 자영이 놈들과 함께 갔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얘기를 끝낸 한철은 토끼를 들고 암동으로 들어갔다. 암동으로 들어간 지 불과 반 각도 안 돼서 가죽을 벗겨낸 뻘건 토끼를 들고 나왔다. 소연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한철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주 고약한 늙은이였다.
한철은 동굴 한쪽에 만들어 놓은 화덕에다 장작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이라 그런지 불은 금방 타올랐다.
타닥, 타닥, 타다닥--
불꽃이 튀기 시작하자 노인은 쇠꼬챙이에 토끼를 꿰이더니 불 위에 올려놨다. 처음엔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점차 고기가 익으면서 구수한 냄새가 회를 동하게 만들었다. 소연은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자 얼른 돌아앉았다. 지금 소연은 무척 배가 고팠다. 하지만 못 본 척 돌아앉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소연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런 것도 봐 두어야, 앞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이란 귀천이 없다. 먹을 것을 가려선 안 된다. 알겠느냐? 나는 이런 생활을 터득하는데, 오십 년 세월을 보냈느니라!”
말하던 노인이 잠시 동굴 천장을 멀뚱히 올려다봤다.
“......”
고기 익는 냄새가 이번엔 아주 고소한 냄새로 변했다.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모닥불 앞으로 다가앉았다.
‘어차피, 이 노인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면 무공도 배우고, 그래 뭐든지 다 배울 거야! 그런데 나한테 뭔가 속이고 있어? 놈들이 아직 만화곡 주위에 진을 치고 있다면, 나를 잡겠다고 남았을 거야,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가만히 계시진 않았을 텐데, 혹시, 무슨 변을 당하신 것은 아닐까? 할아버지! 자영아!’
할아버지와 자영을 생각하자 눈물이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소연은 얼른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다. 아니, 네가 그 뒷수습을 해야지, 그러니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할 것이야!”
“할아버지! 아까 하신 말씀에는?”
“소연아! 자 이것부터 먹고 나서 얘길 하자, 받아라!”
“......”
소연은 노인의 싸늘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곤 건네주는 토끼고기를 받아 들었다.. 살점이 많은 뒷다리였다. 소연은 조금씩 고기를 뜯어먹었다.. 고기는 생각보단 맛이 있었다. 소연의 손놀림이 빨라지더니 아예 통째 입으로 가져가 뜯어먹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토끼고기가 이렇게 맛이 있을 줄은 소연으로선 진정 몰랐던 일이었다.
“자, 이것도 먹어라!”
한철이 남은 뒷다리마저 건넸다.
소연은 한철이 건네준 뒷다리마저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그러고 보니 소연은 만 하루 동안 국화차 한잔 마신 것이 전부였다. 소연의 얼굴은 기름이 묻어 번들거렸다. 그것을 소연은 손으로 쓱쓱 닦았다.
항시 깨끗한 것을 좋아하던 소연이었다. 그런데 소연은 하루아침에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보다 더 털털하게 변해있었다. 한철 노인은 게눈 감추듯이 고기를 먹어 치운 소연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리곤 소연 앞에 마주 앉았다.
“소연아!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네, 말씀하세요.”
소연은 다하지 못한 말씀을 하려는 것이라 짐작했다.
“소연아! 어떤 말을 하더라도 놀라진 말거라!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연아! 내 생각은 네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것 같고, 자영은 행방불명이 된 것 같다.”
소연은 한철의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대들 듯 말했다.
“그 무슨 말씀이세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요. 그리고 또 뭐예요. 자영이가 실종되었다고요,”
소연은 아연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도, 자영이가 실종되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소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까지 멍해졌다. 그래도 소연은 억지로 정신의 끈을 잡았다.
“어허! 진정해라! 그리 호들갑을 떨면 말을 어떻게...”
“알았어요. 말씀하세요.”
“소연아! 놈들 때문에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초막은 불타 없어졌다. 아마도 큰 싸움이 있었는지 만화곡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놈들은 너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놈들이 이곳에서 철수하기 전에는 너는 밖의 출입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 내가 놈들의 동태를 잘 살필 것이니 그리 알거라! 그리고 소연아! 일이 이쯤 되었다면 너도 나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러하냐! 그간의 일을 소상히 말해 보거라?”
소연은 노인의 말을 듣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이 밉고 싫었다. 소연은 그동안 할아버지가 그렇게 두려운 얼굴로 계셨던 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소연은 한 번씩 할아버지가 무공 수련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었다. 그땐 몇 번이고 놀랐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놈들이 왔을 때 몹시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소연으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왜? 자신만을 도망치게 했는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곤 한철을 쳐다봤다.
“할아버지! 그런데, 제가 이곳으로 올 때 작은 보퉁이를 들고 있었을 텐데, 못 보셨나요, 분명 할아버지가 보퉁이를 챙겨 주셨는데?”
문득 할아버지가 챙겨주신 보따리가 생각났다.
“너는 숨어있을 때부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혹여 내가 어쨌을 가 봐 의심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걱정이라?”
“......”
소연은 할아버지가 챙겨주신 보퉁이라 중요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크게 중요한 물건들은 아니었다.
태궁은 소연에게 무룡과 혼인할 때 쓰라고 돈이 될 만한 패물과 옷 한 벌을 챙겨주었다. 다만 태궁의 서찰이 한 통 보퉁이에 들어있었는데, 그것도 소연에게 쓴 서찰로서 여인이 남편에게 내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가 쓰여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연은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라 여겼다. 특히 무룡에게 건네줄 물건과 서찰이...
“그럼 도망치다 잃어버렸나. 아, 큰일 났네,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있었을 텐데, 할아버지! 이를 어쩌면 좋죠?”
“소연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네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잊어라! 알겠느냐?”
“그래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허허, 한번 찾아는 보겠지만, 찾기가 힘들 텐데,”
“전, 꼭 찾을 거예요.”
“고집하고는, 암튼 집착은 말거라! 알겠느냐?”
“하지만, 네, 할아버지,”
소연은 한철의 치켜뜬 눈을 보고 공손히 대답했다.
소연은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무룡에게 보내는 할아버지 서찰이 보퉁이에 들어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놈들이 보퉁이를 찾게 된다면, 틀림없이 무룡에게 보내는 서찰을 보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놈들은 무룡을 찾아 나설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룡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소연은 생각했음이었다.
“......”
“할아버지! 그 보퉁이를 꼭 찾아야 합니다. 보퉁이만 찾아주신다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제발 꼭 찾아주세요.”
소연은 몸이 달았다.
무룡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모두 다 자기 탓이라 여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 놈들에게 잡혀가는 것이 나았다고 엉뚱한 생각까지 하는 소연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룡만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소연의 지금 심정이었다. 그만큼 무룡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음이었다.
“무엇이 들어있기에 그러는 것이냐?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해 보거라! 어서!”
“......”
한철의 묵직한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린 소연은 그날의 일을 소상히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한철의 눈에 일순 날카로운 빛이 일렁거렸다.
“소연아! 일어서거라! 지금부터 너는 내 제자가 되는 것이다. 구배(九拜)를 올려라! 사부에게 올리는 예니라!”
한철이 소연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정말 제가...”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네 앞길을 터주기 위한 것이다.”
한철의 목소리에는 엄엄(嚴嚴)한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래 내 인생이 이렇게 엉망으로 꼬인 것도 따지고 보면 무공을 모르기 때문이야! 벌써 무룡이에게 갔을 텐데, 무공을 몰라서 이렇게 된 거야, 만약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꼭 복수하고 말 거야!! 무룡이도 지켜주고...’
소연은 일대 결심을 했다.
“사부님! 소녀, 사부님께 인사 올립니다.”
“오냐! 오냐! 그래야지, 허허허!”
소연은 한철에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한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난생처음으로 그것도 여 제자를 받아들였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이렇듯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시작되었고, 소연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강호를 들썩이게 할 여인살수(女人殺手)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었다.
------------계속
상상의 세계는 창작의 寶庫다.
^(^,
응원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긍정의 삶으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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