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은 책을 펼쳐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 언저리와 눈가가 파르르 떨었다.
‘할아버지! 지금은 집에 내려갈 수가 없어요. 아직도 놈들이 저를 찾겠다고 난리인가 봐요. 그런데 할아버지, 보퉁이를 잃어버렸으니 어쩌지요. 보퉁이엔 중요한 것이 들어있었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할아버지!’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을 뜬 소연은 책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자 곰팡이 냄새가 났다. 비록 퇴색은 되었으나 등불에 비친 그림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나 같이 선녀가 날개옷을 입고 춤추는 그림들이었다. 그림 밑에는 주해(註解)가 깨알 글씨로 촘촘히 쓰여 있었다.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림에 몰입되어 갔다.
선녀의 춤추는 동작은 아주 섬세하고 유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발동작 하나하나에도 선을 연결시켜 알아보기 쉽게 그려져 있었고, 손을 움직일 때의 손끝 하나에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세세히 그려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선녀의 춤을 보는 듯이 착각에 빠졌다.
소연은 상상으로 춤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나비의 나풀거리는 날갯짓처럼 소연도 따라서 춤을 추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의 유연한 흔들림까지, 대나무가 휘었다 퉁겨지는 빠름같이 소연은 손과 발을 움직였다. 소연은 완전히 춤사위에 몰입되었다. 그런 소연의 몸이 좌우로 흔들 거렸다. 신내림 굿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춤추는 그런 상태에 빠진 듯이...
소연은 상상의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한없이 날아갔다. 푸른 초원을 지나 강을 건넜다. 꽃들이 만개한 화원을 돌아가자 고송들로 이루어진 숲이 나타났다. 그리고 숲을 지나 언덕을 넘고, 또 산을 넘어 기암괴석들로 장관인 깊은 계곡을 지났다. 그리고 용트림을 해대는 거대한 폭포수 앞에 내려섰다.
폭포수를 마주하고 수만 년은 살았을 만년송(萬年松)이 푸름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그 앞으로 펼쳐진 넓은 풀밭엔 수많은 사람들이 제를 올리기 위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차례대로 만년송에 제를 올렸다. 만년송엔 오색 깃발이 연 걸리듯 걸려 바람에 나부꼈다.
잠시 후 소연은 만년송 앞에서 춤을 췄다. 북소리와 징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가운데, 사람들의 환호에 화답을 하듯이 소연은 춤을 췄고 선녀가 되었다. 그림 속의 선녀가 된 소연은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며 춤사위를 놀렸다. 그렇게 소연은 점점 황홀지경에 빠져들었다.
“소연아! 책은 안 보고, 몸은 왜, 흔들어 대느냐? 소연아!”
“네- 왜요?”
“너 지금, 꿈 꿨냐?”
“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사부님! 내 꿈 물어내요.”
“무엇이라! 이거야 원, 앉아서 자니까? 잠이 잘 오냐?”
“그래요. 나도 앉아서 잠 잘 자요.”
소연은 눈을 흘기곤 빽 쏘아붙였다..
소연은 상상이던 환상이 되었던 그 순간이 무척 아쉬웠다. 이것이 바로 무무공(舞武功)을 익히는데 절대적인 춤이라고 생각했고, 꿈속이지만 실제 상황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소연아! 사부가 출출한데, 먹을 것을 준비해라!”
“오늘은 사부님이 준비하세요, 나는 무공을 익혀야 해요,”
소연은 쳐다보지도 않고 책을 들여다봤다.
“이거 내가 상전을... 나도 미쳤지, 혼자 살자니 입에 가시가 돋아 입가심이라도 할까 했더니만, 제기랄 좋은 제자 겸 수발을 들게 하려다가 으이그, 내 꼴이 이게 뭐냐! 좋다. 네 말대로 오늘은 봐준다.. 괜히 책은 줘선, 어쨌든 두고 보자, 사부님! 사부님! 할 때가 있을 테니...”
한철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부스스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
무룡은 일단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에게 몇 가지 당부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룡아! 놈들이 그렇게 무서운 자들이라면 너도 몸조심해라! 그런 놈들은 무고한 사람도 이유 없이 해친다고 들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도 조심하세요. 쉽게 돌아갈 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소연이는 언제든 집에 꼭 올 겁니다. 잘 보살펴 주세요, 저는 내일 암동으로 들어가면 당분간은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잘 생각했다. 아비 걱정은 말고 수련에만 전념해라!”
“예, 아버지!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오냐! 푹 자 두어라!”
“......”
무룡은 잠시 창밖을 내다봤다. 멀리 보이는 천지봉이 어둠 속에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지금 천지봉 정상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앞일을 생각하는지, 달빛에 어린 무룡의 얼굴엔 수심보다는 굳은 의지가 어렸다.
“비급과 서책들을 어떻게 한다. 집에 그냥 두고 갈까, 혹시라도 불순한 자들에게... 그런 일은 없겠지만, 몇 권만 챙기고, 아버지에게 잘 숨겨두라고 해야겠다. 그래, 마공 비록과 사악한 비급들은 아예 태워 버리는 것이 좋겠다. 뭐 내가 익힐 무공도 아니고, 아무튼 내 머릿속엔 다 갈무리되어 있잖아,”
무룡은 서가에서 몇 권의 비급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
“무슨 일이냐?”
“할아버지가 준 비급을 태워 버리려고요,”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아무래도 비급과 태궁 할아버지, 그리고 놈들 간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요. 만약을 생각해서 태워 버릴 겁니다. 참 아버지! 내일 저는 몇 권의 서책만 챙겨서 올라갈 겁니다. 나머지 책들은 아버지가 파묻던지 잘 숨겨두세요. 아예 제 방을 막아버리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알았다. 그렇게 하마!”
무룡은 마공 비록과 몇 권의 비급들을 태워 버렸다.
태궁 할아버지에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무룡은 일찍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무엇을 짊어졌는지 꽤 큰 등짐을 짊어졌다. 등짐은 무룡이 챙긴 몇 권의 비급과 아버지인 만복철이 주섬주섬 챙겨 넣어준 건량과 옷가지가 들이었다.
“무룡아! 모든 일은 때와 시기가 있는 법, 서두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명심해라! 네 어머니 말씀을 깊이 새기면 다 잘될 것이다. 그런데 무룡아! 나중에 말해줄까 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말해주는 것이 좋겠다.”
무룡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직시했다.
“무슨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말씀을 해 주세요.”
“그게 말이다. 너와 생모를 찾던 인물이 있었다.”
“예! 누가요? 그게 언젠데요?”
놀란 듯 무룡이 다그쳐 물었다.
“이놈아! 무예 그리 호들갑이냐! 그러니까...”
만복철의 얘기는 무룡이를 업둥이로 데려오고, 한 3개월쯤 지났을 때의 얘기였다.
만복철은 마누라 극성에 아기 무룡을 목욕시키기 위해 폭포수가 있는 계곡으로 가고, 집에 혼자 남은 조추월은 아기에게 먹일 암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커다란 방간을 꾹 눌러쓴 30대로 보이는 한 무사가 초옥으로 찾아왔다. 무사는 갓난아기를 안고 다니는 30대 여인을 찾는다며 본 적이 있느냐고 정중히 물었다는 것이었다.
초추월은 무사의 행색도 행색이지만, 여인의 만신창이 시신이 생각나 무사를 믿을 수가 없었고, 게다가 여인이 죽고 없는 상황에서 사실을 말할 수는 더더욱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여인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무사는 혹시 모르니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만나거든 구연걸이란 사람이 건강한 몸으로 찾고 있더라고, 꼭 전해 달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고 했다.
“구연걸이라 하셨습니까?”
무룡의 귀에는 구연걸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 방갓의 무사는 자신을 죽이려고 나타난 자가 아니라, 진정 자신을 찾기 위해 나타난 자라고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친부의 유언을 보기 전이라면 이런 생각도 못 했을 것이었다.
“무룡아! 네 어미가 쉬쉬했지만, 네가 구연걸이라는 이름만큼은 꼭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말해준 것이다. 모쪼록 모든 일에 신중하고 수련에 정진하여라!”!”
“걱정 마세요. 아버지!”
무룡은 울컥하는 것이 가슴속으로부터 치솟아 올랐으나 억지로 쓸어내렸다.. 그리곤 아버지 얼굴을 머릿속에 판박이 해놓으려는 듯 만복철을 뚫어지도록 쳐다본 뒤돌아섰다..
‘아버지! 몸조심하세요. 한 달에 한두 번은 다녀갈게요.’
무룡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터벅터벅 걸었다.
‘무룡아! 아버지 걱정은 말거라! 나는 네 걱정뿐이다. 공연히 아비 생각해서 쪼르르 내려올까 그것이 걱정이다.’
만복철은 무룡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질 않았다.
“......”
한편, 그 시각이었다.
일단의 흉흉한 자들이 불탄 자리를 훑어보고 있었다.
햇살에 드러난 만화곡은 완전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만화곡 입구만 들어서도 국화 향기가 가득하던 만화곡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화밭이 파 헤쳐져 엉망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초막이 있던 주위는 물론 태궁이 묻혀있던 구덩이까지 파헤쳐져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현장은 너무도 살벌하고 끔찍했다.
“공자! 혹시 불을 질렀을 때,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비급을 영영 못 찾는다는 얘기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공자! 그때 너무 성급했던 같습니다.”
“아니다. 태궁 늙은이가? 그 귀한 비급을 그냥 놔뒀을 리가 없다. 이곳에 없다면 틀림없이 그 계집이 가지고 달아난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는 계집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궁금해서도 말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이곳에 매복한다. 만약 비급을 찾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할아버지를 뵙겠느냐! 꼭 그 계집을 찾아낼 것이다. 너희들은 그리 알고 근처에 매복을 서도록...”
복명! 복명!
사나이들이 비호처럼 사방으로 사라졌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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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삶으로 파이팅!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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