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룡이 암동으로 돌아온 지 벌써 칠일,
침상 위,
무룡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마치 득도한 스님처럼 평온해 보였다.
다만 암벽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던 서책들이 중구난방으로 꽂혀있었다. 무룡이 서책들을 봤음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마도 한 시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그때서야 부르르 몸을 떨어댄 무룡이 눈을 치떴다. 순간, 눈에서 밝은 빛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강한 빛은 아니었었으나 어느 정도 내공이 증진됐다는 증거였다.
“......”
하지만 무룡 자신은 자신에게 엄청난 기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암동에서 갓난아기의 몸으로 천년 설삼(千年雪蔘)과(千年雪蔘) 기인이 만들어 놓은 각종 영약을 그것도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기연으로 엄청난 진신 내공이 몸속에 축적이 되었다. 아마 아기가 아니었다면 기연의 효력이 절반 이상으로 반감이 되었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기연의 효험이 성장한 무룡의 몸속에 진신 내공으로 축적이 되었다는 것은 무룡에게는 크나큰 복이었다.
침상에서 내려온 무룡은 처음부터 침상 밑에 있던 긴 궤짝을 꺼냈다. 궤짝은 재질이 박달나무라서 그런지 꽤 묵직했다. 그리고 뚜껑도 먼지가 쌓여있을 뿐 상태는 양호했다.
무룡은 궤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특별한 것이 들어있을 것이란 생각은 했었다. 사실 생각대로 궤짝 안에는 검은색 천으로 싼 길쭉한 물건과 한 권의 서책, 그리고 무엇이 들었는지 묵직한 자루가 들어있었다.
무룡은 먼저 맨 위에 놓여있는 책부터 집어 들었다.
책은 얇은 양피지로 만들어져 있었다.
“......”
검비록(劍秘錄)!
책표지엔 검비록이라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쓰여 있었다.
무룡은 검비록의 앞뒷면을 자세히 살폈다.
특별한 문양이나 다른 글씨는 쓰여 있지 않았다.
무룡은 주저 없이 표지를 넘겼다.
그 순간 환청이 들렸다.
‘허허, 드디어 연자(緣者)가 암동(巖洞)에 들었도다.’
무룡은 책을 펼치자마자 들려온 환청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침착하게 정신을 수습하고 암동을 살폈다.
“......”
연자(緣者)는 내 말을 경청하라!
나는 이름이 없는 무명자(無名者)다.
나는 일찍이 속세를 떠나 강호를 유람했었다. 그때 출가를 할까 생각도 했었으나,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포기를 했다. 그렇게 떠돌이가 되어 주유천하하던 중에 한 기인을 만났다. 그때가 내 나이 사십이었다. 이미 인생에 대해 알만큼은 안다고 자부했던 나에게 기인께서는 일침을 놓으셨다. 기인께서는 ‘숨이 끊어져 죽기 이전엔 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라고 일침을 놓으시곤 공부를 계속하라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나는 그 연유를 물었다.
기인 왈(曰),
인간은 모태에서 열 달을 살고, 모유(母乳)만으로도 십 년을 살고, 화식을 먹고 십 년을 살고, 생식을 먹고 평생을 살다보면 늘 새로운 인생이니, 이것이 ‘답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우주만물(宇宙萬物)중에 사람을 소우주(小宇宙)라 했느니, 사람의 육신(肉身)이 그와 같다 하시며, 신선 되는 길이 바로 이 안에 있다 하셨다.
연자(緣者)여!
인간은 먹은 만큼 배설을 해야 하고, 흘린 땀만큼 물이든 피든 보충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소우주(小宇宙)이니 상처가 나면 자력(自力)으로 아물고, 머리가 빠지면 또 난다. 또한 근육과 살도 그와 같아서 손상된 것들은 자력으로 생성된다. 이 같은 원리는 사람의 몸(體) 자체가 자연치유능력이라는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소우주라 하였듯이 인간의 몸인 신체(身體)가 서로 상생(常生)하여 부족한 것은 채우고 상처를 치유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 후부터 사람의 몸에 관해 연구했다. 그리하여 치유능력을 키워주는 영약을 개발하였다. 그 시절 강호는 악인들이 득세했을 때였으므로 나는 내 몸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검비록(劒法)까지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검비록(劍秘錄)은 우주의 힘을 응용한 검법이다.
연자(緣者)는 모쪼록 중생구제(衆生救濟)에 사용토록 하라!
무명자(無名者)가 연자(緣者)에게 남긴다.
무룡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으나, 호기심이 발동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치에 맞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부합되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무룡은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자연치유능력, 분명 사람의 몸엔 그런 능력이 있다. 상처가 났을 때 꼭 치료해야 낫는 것은 아니다. 자연적으로 피가 멈추고 아문다. 바로 그런 이치를 깨우치길 바라셨을 것이다. 무명 자 님! 연구도 하고 검법도 익히겠습니다.”
무룡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떴다.
다음 책장을 넘기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기마 자세로 서서 검을 땅으로 내렸다가 하늘을 찌르듯이 치켜올린 그림이었다. 다음 장은 하늘을 찌른 검이 원을 그리며 횡으로 그었다가 앞으로 쭉 뻗어낸 그림이었고, 다음 장엔 앞으로 뻗은 검을 몸을 회전시키면서 끌어들였다가 종으로 내려 긋고,, 검이 발끝을 향하게 하는 자세였다.
“이게 뭐야! 이것이 검법!”
무룡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장은 백지였고 그다음 장도 백지였다.
그렇게 마지막 장인 다섯 장을 넘기자 글이 쓰여 있었다.
연자(緣者)여!
검법이라는 것이 이렇듯 쉬울 줄은 몰랐다.
세 가지 동작은 연결된 동작이다.
그 안에 천지를 진동할 검법이 들어있느니라!
대성하기를 바라노라!
글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무룡은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연결 동작이라, 연결 동작이라, 음, 기막힌 검법이다. 과연 기인이시다. 한 가지 초식을 세 가지 초식으로 한 번에...”
무룡의 눈에 이채가 발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룡이 책을 덮고는 길쭉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감싼 보자기를 풀었다. 그 순간 눈부신 빛살이 검병에서 뿜어져 나왔다. 살펴보니 손잡이에 박힌 오색 보석들 때문이었다.
무룡은 검을 들고 일어서선 검의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검이었다. 손잡이를 틀어쥐자 박혀있는 오색 보석에서 다섯 가지 색다른 기운이 무룡의 장심(掌心)으로 밀려들었다. 순간적으로 무룡은 검을 놓칠 뻔했다. 그렇지만 무룡은 아주 침착하게 손잡이를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그리곤 밀려드는 기운의 성질이 어떤 성질인지 따져보기 위해 눈을 감았다.
손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기운을 느낀 순간, 손이 타버릴 것 같은 불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젖무덤을 만지는 것처럼 아주 부드러운 땅의 기운을 느꼈고, 생동감 넘치는 나무의 기운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어렴풋이 모태에서 느껴본 시원하면서도 아늑한 물의 기운을 느꼈다.
이렇듯 다섯 가지의 기운을 느낀 무룡이 눈을 번쩍 떴다.
눈에서 기광(奇光)이 번쩍였다가 사라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가문의 무공도 경천할 일이요, 마교의 무공도 경천할 일이다. 무공 비급들이 하나 같이 경천할 무공들이니, 세상에 어느 무공이 우위에 드는지 가늠도? 아니, 하나 더 있다. 항마신공도 그에 못지않은 무공임에 틀림없다.’
스 르 릉,
무룡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뽑히는 순간 백색 빛이 암동 안을 가득 메웠다.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무룡은 검을 천천히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빛들이 춤추듯 암동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무룡은 한동안 현란하게 뿌려진 빛을 멍청히 바라봤다.
“아! 검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빛이 뿜어지다니, 처음으로 검을 뽑아보지만 이런 경이적인 일이 벌어질 줄은 진정 몰랐다. 검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닐 테고, 분명 명검은 명검일 것이다. 그런데 기인께서는 왜, 검에 대한 설명은 남기지 않으셨을까?”
무룡은 잠시 신비한 듯 검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명검이다. 명검엔 이름이 있다 했다. 그렇담 내가 검에게 이름을... 그래,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앞으로 내 몸처럼 함께 다닐 검이니, 그렇다면 날 낳아주신 아버지와 길러주신 아버지 성을 따서 만검(萬劍)이라 하자! 만검! 꼭 내 동생 같다. 좋아, 내 동생 만검!! 우리는 어디를 가던 함께 간다. 알았겠지 만검(萬劍)!!”
“......”
무룡은 검신(檢身)을 한차례 천천히 쓰다듬은 뒤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는 검을 몇 번 더 쓰다듬어 준 뒤 원래대로 궤짝에 넣어 침상 머리맡에 놓았다.
우우워, 우--
늑대의 울음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
추석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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