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대장부의 눈물
하늘엔 아름다운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마치 목화솜을 풀어 하늘에 띄워 놓은 것 같았다.
뭉게구름 사이로 중천에 떠오른 태양이 간간이 얼굴을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따사로운 햇살이 천지봉 일대로 쏟아져 내렸다. 그 햇살을 타고 상큼한 냄새가 춤추듯 사방으로 흩날렸다. 햇살을 품은 봄바람이 휘날린 탓이다.
평화롭고 아름답던 만화곡,
국화꽃 향기가 가득했던 만화곡이 귀곡성이 들릴 것 같은 흉물스러운 곳으로 변해있었다. 곳곳엔 몸을 숨긴 흉흉한 자들의 날카롭고 음산한 눈빛들이 사위를 할퀸다.
초막이 불길에 스러지고 남은 것은 어질러진 잔재뿐이다. 그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살기를 뿜어내는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일견 하기에도 사나이들은 보통 사나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천태일과 무자비한 혈살대 인물들이었다.
“공자! 벌써 이십삼일 쨉니다. 이젠 돌아가는 것이...”
“좋다, 삼일만 더 기다렸다 철수한다. 일단 전처럼 매복에 빈틈이 없도록 조처하라! 삼 일간이다”
“알겠습니다. 여봐라! 공자님 말씀 잘 들었겠지...”
“염려 마십시오. 얼씬하는 놈은 무조건 잡겠습니다.”
“잡기는... 계집이 아니면 뒤를 미행하라! 그래야 계집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막사로 돌아갈 것이다.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하라!”
복명! 복명! 복명!
안개가 흩어지듯 사나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장내는 싸늘한 바람만 맴돌았다.
한편 그 시각이었다.
동남쪽 위험천만한 계곡을 한 사나이가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사나이의 걸음걸이는 일반 사람들 걸음걸이와는 달랐다. 발걸음은 무릎을 구부린 듯이 걸었고 팔은 엇박자로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아주 수월하게 가파른 계곡을 타 넘고 바위를 뛰어넘으며 걸어왔다. 실상은 걷는 것처럼 보였으나 훌쩍훌쩍 날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사나이는 훌쩍훌쩍 날아오더니, 절벽 밑에 있는 동굴 앞에 멈춰 섰다. 반바지에 웃통을 벗은 사나이는 일견 하기에도 일반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딱 벌어진 상체는 근육질이 단단해 보였고, 키도 육척(六尺)에 가깝고, 균형 잡힌 몸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劍鬪士)를 보는 것 같았다. 사나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상체의 근육과 허벅지의 근육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이목구비 역시 뚜렷했으며 약간 커 보이는 눈과 우뚝한 코가 남아 대장부임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무룡은 허공답보(虛空踏步)인 허공만보(虛空萬步)를 이용해 계곡 밑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왔다. 처음보다는 많이 숙달된 듯 숨소리도 거칠지가 않았다.
“음, 대단한 경공술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 평가하기는 그렇지만, 그 어떤 경공술도 허공만보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허공만보를 대성한다면 십 장도 날아서 건널 것 같다.”
무룡의 입엔 흡족하다는 미소가 어렸다.
허공답보(虛空踏步)인 허공만보는 자연현상(自然現象)을 이용한 경공술이라고 말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허공만보의 경공술을 펼치려면 먼저 자연현상에 동화되어야 한다. 자연에 동화되려면 그 걸음걸이와 팔 동작에 유연성이 있어야 하고 마음 일체를 자연에 맡긴 채 유연한 걸음걸이와 팔 동작으로 물이 흐르듯 바람을 타듯이 몸을 움직여야 한다.
허공만보를 대성하게 되면 지금의 걸음걸이나 팔 동작도 평상시처럼 돌아와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다. 허공만보를 사용하고 싶을 때는 마음먹기에 따라 자연적으로 경공술을 펼치게 된다. 허나 대성을 이루기 전까지는 행동에 불편이 따른다.
무룡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암동은 생각보다 깨끗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무공수련을 하다 보면 물건들을 일일이 챙기지 못했을 법도 한데 무룡은 대체적으로 정리를 잘해 놓은 상태였다. 한때는 서책을 탐독하느라 정돈엔 아예 신경도 쓰질 못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무룡은 무명자(無名者)가 수집해 놓은 서가의 책들을 섭렵했다. 대부분 기인이 연구한 의서(醫書)였으나 개중에는 마음에 드는 의서와 잡다한 서적도 꽤 되었다. 꼭 필요하다고 인정이 되는 것은 머릿속에 갈무리를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것들은 대충대충 읽어보는 수준에서 책을 덮었다.
잠시 암동을 살핀 무룡은 구석에 있는 호리병들을 챙겼다. 만복철이 좋은 뜻에서 아기였던 무룡에게 먹이고 남은 영약들이었다. 무룡은 무슨 생각에선지,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호리병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순간, 무룡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병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보고 놀랐던 모양이었다. 병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면 누구라도 놀랐을 것이다. 병은 모두 일곱 개였고 내용물이 절반씩 들어있었다.
지음액(地陰液), 세상에서 제일 음기가 강한 영약이다.
소액(消液), 위장(胃腸)이 부실할 때 사용하라!
화액(和液), 몸이 썩을 때 사용하라!
수액(樹液), 여인에게 유용한 영약이다.
토액(土液), 기(氣)가 약할 때 사용하라!
독액(毒液), 만독(萬毒)을 제어한다.
천지액(泉地液), 기력을 보하고 오관을 밝게 한다.
무룡은 자세한 설명은 쓰여 있지 않았으나, 대단한 영약들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후일 요긴하게 사용하리라 결심했다.
무룡은 아직까지도 이 많은 영약들을 자신이 모두 복용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속에 엄청난 힘이 갈무리되어 있음도 아직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인 만복철이 네가 아기 때에 영약들을 섞은 탕약을 잘못 먹여 죽이는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가끔 단전이 꿈틀거리는 것이 이상하단 생각은 했었으나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아버지의 말씀에 혹시나 하는 의혹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이렇듯 귀한 영약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자세히 설명한 비기가 있을 터, 비기(秘記)들을 다시 읽어봐야... 그런데, 아버지는 어찌 지내시는지...?”
문득 떠오른 아버지 생각에 무룡은 시무룩해졌다.
무룡이 암동에서 기거한 지20일째였다.
무공을 수련할 때도 비기(秘記)을 읽을 때도 문뜩문뜩 아버지 생각이 났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아버지가 몹시 보고 싶었다. 늙으신 아버지를 홀로 두고 나와 있는 자신이 불효막심한 것 같아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그렇다 보니 모든 일에 마음만 앞서고 서두르는 경향이 있었다.
“아버지! 수일 내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히 계십시오.”
무룡은 아버지를 찾아가 뵙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는 처사였다.
***
어스름 달빛에 적송들이 드러났다.
등불이 걸려있는 싸리대문이 활짝 열려있었지만 초옥은 적막이 감돌았다. 조추월이 살아있었을 때는 사람 냄새가 뭉클뭉클 넘치듯 흘러나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기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등불은 걸려있으나 납작 엎드린 초옥은 그야말로 폐가와 흡사했다.
쿨룩! 쿨룩! 쿨룩!
흐릿하게 불빛이 새 나오는 방 안에서 메마른 기침 소리가 들렸다.
“무룡아! 잘 지내고 있느냐? 이 아비는 잘 지내고 있다. 그나저나 만화곡에도 한번 가봐야 하는데, 소연 아가씨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면, 우리 무룡이가 상심이 클 것인데, 안 되겠다, 내일 일찍 만화곡엘 가 봐야겠다. 그래야, 어찌된 상황인지 알 수도 있을 게고, 무룡아! 이 아비가 내일은 만화곡엘 다녀오마, 소연 아가씨가 계시면 집으로 데려올 것이니, 너는 무공수련에만 전념해라! 쿨룩, 쿨룩,”
만복철은 등불 앞에 앉아 짐승가죽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토끼와 족제비가죽인데 열 마리 분량은 되는 것 같았다.
아들을 산으로 보낸 만복철은 부쩍 더 늙어 보였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자식이 마음에 두고 있는 소연이가 이제나 찾아올까, 혹여 잘못되었을까,, 그런 것들을 걱정하다 보니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잠도 설쳤을 테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을 터, 몸과 마음이 더 늙었을 것이었다.
“마누라! 마누라가 소연 아가씨를 잘 지켜주시오. 그래야, 우리 무룡이가 무공수련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구려, 아무래도 우리 무룡이가 소연 아가씨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소! 마누라 생각도 그렇지요. 마누라! 마누라! 만화곡이 일을 당했다는 얘기는 들었지요. 선인께서 돌아가시고 초막이 불타고, 화원이 엉망이 되었답디다. 부디 마누라가 애들을 잘 보살펴 주시오. 아이들이 잘 되어야 우리 마음이 편할 것 아니요. 마누라! 머지않아 나도 마누라 뒤를 따라갈 것이니, 그때까지는 쓸쓸해도 참구려, 우리 무룡이는 무공수련에 열심히라오.. 곧 대성을 이룰게요.”.”
만복철은 일하던 손을 놓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딘지 모르게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부엉, 부엉, 부우엉--
열두 그루의 적송엔 부엉이의 둥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밤이면 부엉이는 어김없이 적송에 날아와 울었다. 오늘따라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만복철이 어렸을 때는 한 번씩 적송에 올라가 놀았었다. 그때도 적송은 어린 만복철의 한 아름이 훨씬 넘었다. 그래도 만복철은 나무에 곧잘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혼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의 적송은 몸통이 만복철의 두 아름쯤 되었다. 지금 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적송은 완전 고송으로 자랐다. 만복철이 늙었듯이 그만큼 적송도 나이를 먹었음이었다.
만복철은 부엉이의 울음소리에 문득 어렸을 때를 떠올리고 창밖을 내다봤다.. 그때는 왜 그렇게 아버지가 무서웠던지, 만복철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별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아버지의 엄한 훈육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그렇게 엄했던 아버지의 훈육이 지금 만복철이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는 것을...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일하라!
일한 만큼만 먹어라!’
만복철은 아버지의 지엄한 말씀이 지금도 귀가에 생생하다. 공부를 안 시켜준다고 투덜댄 적도 없었고, 말씀에 토를 달았던 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만복철은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님! 별안간 아버지 생각이 나는군요,, 지금에서 말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내 친자식은 아니지만 무룡이를 볼 때면 어린 시절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아버님! 이제 와서 아버지에게 감사했었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좀 쑥스럽지만 말입니다. 아버님! 저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무서웠던 건 별 갭니다.. 제 마누라는 저승에서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여인입니다. 곧 저도 아버님을 뵈러 갈 것입니다. 어머님께도 말씀드려 주십시오,”
만복철의 깊게 파인 주름에 수심이 가득했다. 오늘따라 만복철의 행동이 이상했다. 천지개벽을 한다 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사람이었는데, 이젠 정말 늙은 모양이었다.
-----------계속
일교차가 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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