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슥, 스스슥, 스슥,
미미하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인영들이 초옥을 에워쌌다. 사나이들의 눈빛이 먹이를 향해 다가오는 야수들의 눈빛처럼 섬뜩하기만 했다.
“......”
쿨룩, 쿨룩, 쿨-룩,
등불을 들고 방 안에서 나온 노인이 심하게 기침을 해대곤 대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기둥에 등을 매달았다.
“멈춰라!”
살기가 어린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솟아오르듯 다섯 명의 검은 인영들이 불시에 대문 앞에 나타났다. 노인은 등을 걸고 돌아서다 기겁하여 그 자리에 장승처럼 멈춰 섰다. 그래도 노인은 침착했다.
“뉘 신지요, 이 밤중에...?”
만복철은 아주 담담히 말했다.
“늙은이! 물을 것이 있다. 묻는 말에 이실직고를 한다면 살 것이나,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목을 벨 것이다. 알겠느냐? 늙은이!”
천태일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보시게 젊은이! 자네의 말하는 투를 보니, 자네 부모가 자식 교육은 아주 잘 시키신 것 같네 만...”
“이런, 쳐 죽일 늙은이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늙은이!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이 집에 젊은 계집이 있으렷다.”
천태일은 눈을 부라리며 재차 일갈했다.
그런 천태일의 몸에선 싸늘한 한기가 풀풀 뿜어졌다.
“이보시게 젊은이! 이 집엔 나 혼자 사네.”
만복철은 한차례 몸을 떨어대곤 아주 조용하게 대답했다. 이미 놈들이 누굴 찾으러 왔는지 대번에 알아차렸고, 놈들을 순순히 돌려보낼 자신도 없었다. 이젠 담담히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만복철은 생각했다.
“대두! 늙은이가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다.”
천태일은 만복철을 훑어보곤 대두란 자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것이 빠르겠지요. 뒤져라!”
“무엇들 하느냐! 샅샅이 뒤져서 계집을 끌어내라!”
“젊은이, 이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나! 이 집엔 나 혼자 산다니까, 사실일세!”
만복철이 급히 나섰으나 이미 사나이들은 초옥으로 달려가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엌이며 방안을 이 잡듯 뒤졌다.
쾅! 쨍그렁! 콰-당! 쿵쿵--
그릇이며 집기들이 박살이 났다. 그런 와중에 몇몇 사나이들은 횃불까지 만들어 불을 밝혔다. 그러자 난폭한 사나이들의 면면이 확연히 드러났다. 길길이 날뛰는 사나이들은 정말이지 살인귀들 같았다.
만복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냥 놈들의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 놈들이 나를 미행했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늙기는 늙은 게로 군,, 옛날 같았으면 이런 놈들 한두 놈은 목을 비틀 수가 있었을 텐데, 그리고 놈들의 동태를 알아챘겠지, 그나저나 큰일이다. 무룡의 방안에 잡동사니를 쌓아두기는 했지만, 혹여 놈들이 무공비급이 있다는 것을 알면, 이를 어쩐다, 그냥 땅에 파묻어 두는 건데...’
만복철은 속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공자! 집 안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 사나이가 달려와 보고했다.
“그럴 리가...? 늙은이 다시 묻겠다. 오늘 만화곡엔 무슨 일로 갔었느냐?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즉시 도륙을 낼 것이다.”
천태일은 대원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노인을 윽박질렀다.
‘휴우, 다행이다. 이젠 죽는다고 해도 한도 원도 두려울 것도 없다. 암, 무룡을 한 번만 봤으면 좋겠지만...’
만복철은 무룡의 방을 대충 훑어본 자가 오히려 고마웠다.
“젊은이, 내 오늘 만화곡에 갔던 것은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적이 있었네! 노인은 한 달에 한 번씩 식량을 구해 달라고 내려왔었는데, 그동안 오지를 않아 직접 찾아가 본 것뿐일세! 그것도 무슨 죄가 되는가?”
만복철은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늙은이가 말도 잘하네, 늙은이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이놈! 듣자 듣자 하니까, 천하에 후레자식! 네 할아비에게도 이렇게 무례하게 구느냐! 쳐 죽일 놈 같으니, 죽을 놈은 바로 너 같은 놈이다. 이놈아!”
“무엇이라! 이 늙은이가!”
“그래 이놈아! 죽여라! 네 부모가 불쌍하다. 천하에 불효막심한 놈!”
“이런, 얏!!”
퍽!
“윽! 쿨룩-”
만복철은 이판사판이었다. 순순히 대했다가는 놈들이 어떤 짓거리를 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방안을 다시 뒤진다거나 할 때는 분명 무공비급들이 발각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선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놈들이 알아차릴 것이고, 틀림없이 이곳을 감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룡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자신을 인질로 잡는다면 무룡은 스스로 나타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만복철은 치를 떨었고, 어차피 죽을 몸, 수장인 젊은 놈을 약이라도 올려 아예 살수를 쓰게 만들 심산인 것이다. 그래야 놈들이 다시 방안을 뒤지는 일도 없을 것이고, 아예 의심 없이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만복철의 생각대로 천태일은 살수를 쓴 것은 아니지만 가볍게 장풍을 날렸다.. 가볍다고는 하지만 노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만복철은 가슴을 부여잡고 울컥 피를 토했다.
“죽일 놈! 쿨룩, 죽여라! 쿨룩-쿨룩-”
“늙은이가 죽지를 못해 안달이 났군. 늙은이! 이실직고를 하면 살려 주겠다. 순순히 실토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쳐 죽일 놈! 무엇을 더 말하라는 것이냐?”
“......”
‘순순히 말들을 늙은이가 아니군, 정말 혼자 사나, 이 정도 했으면 살려달라고 없던 말도 지어서 술술 말했을 텐데? 늙은이가 아주 지독하군.’
천태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옥에 불을 질러라! 그래도 말을 안 하는지 두고 보자!”
별안간 천태일이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불을 질러라!”
“복명!”
횃불을 들고 있던 사나이들이 초옥 앞으로 다가갔다.
만복철은 그런 자들을 노려볼 뿐 말이 없었다. 천태일은 노인을 싸늘하게 쓸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늙은이다. 불을 붙여라! 늙은이 어떠냐? 이젠 죽어주어야겠다.”
“미친놈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썩을 놈!”
만복철이 기력을 다해 악다구니를 해댔다.
“.......”
초옥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휘익!
대두란 자가 검을 빼들자마자 휘둘렀다.
“으아악! 무...”
불빛에 반사된 푸른 검기가 만복철을 긋고 지나갔다.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고, 만복철은 가슴에서 목으로 이어진 긴 상처를 입은 채 앞으로 푹 거꾸러졌다.
“우리...무...”
그렇게 쓰러진 만복철은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더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부릅뜬 눈은 감지를 못했다. 가슴과 목 부위에선 검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와 대문 앞을 흥건히 적셨다.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충천했다. 불길에 놀랐는지 적송에 앉아있던 부엉이가 길게 울음을 남기며 천지봉 쪽으로 날아갔다. 불길에 드러난 사나이들은 꼭 살인귀들이었다.
사나이들은 불타는 초옥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보듯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천태일이 돌아서며 싸늘히 누워있는 만복철을 쓱 훑어봤다. 그리곤 사나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대두! 이곳에서 철수한다. 가자!”
“알겠습니다. 여봐라! 철수한다.”
“철수! 철수!”
사나이들이 분분히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 경계를 서던 자들도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떠난 초옥 앞에는 죽은 만복철의 싸늘한 시신만이 누워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초옥도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지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별들마저도 슬픈지 유난히 깜박거리는 밤이었다.
***
끼이룩- 끼이룩- 끼끼룩---
지난밤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가,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남쪽 하늘을 몇 번 선회하더니 천지봉 북쪽으로 날아갔다.
“무슨 까마귀가 저리 시끄럽게 울어대지? 아버지는 까마귀가 울면 불길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일이? 혹시 소연이가? 오늘은 아버지를 뵙고 만화곡엘 다시 가 봐야겠다.”
동굴 입구에서 몸을 풀고 있는 사나이는 무룡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경공술을 수련하고 막 돌아온 무룡은 멀리 집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엔 수많은 까마귀들이 선회하며 울어대고 있었다. 이를 본 무룡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고, 불현듯 아버지와 소연이가 걱정되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무룡은 급히 동굴로 들어가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나절이었다.
한 사나이가 산 능선을 이상한 걸음걸이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으나 훌쩍훌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사나이는 산등성에 보였다 싶었는데, 어느새 능선 아래에 당도해 있었다. 사나이는 아직도 북쪽 하늘을 선회하며 울고 있는 까마귀 떼를 잠시 쳐다보곤 걸음을 재촉했다.
산자락에 막 내려선 사나이의 얼굴이 순간 경직되었다.
사나이 눈에 들어온 것은 열두 그루의 적송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연기가? 아우-”
사나이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이 아니었다.
화난 맹수가 달려가듯 포효하며 내 달렸다.
무룡은 아버지 시신 앞에 멍청히 서 있었다.
잿더미가 된 집에선 마지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만복철은 어젯밤 쓰러진 자세 그대로 누워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주위 1장 넓이의 땅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들짐승들이 피 냄새를 못 맡았는지, 다행스럽게 시신은 온전했다.
잠시, 장내를 살펴본 무룡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룡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분노로 부르르 떨었다.
“아버지! 무룡입니다. 어찌 되신 겁니까? 누구 짓입니까? 네! 아버지! 아버지! 말씀을 해 보세요. 아버지! 으아, 아!”
무룡은 아버지를 바로 누이며 손을 잡았다.
침착하려고 애를 썼으나 아버지의 끔찍한 몰골을 대하자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무룡은 울부짖었다. 아버지를 흔들다가 이번엔 두 주먹을 말아 쥐곤 땅바닥을 마구 내리쳤다.
“으아, 우, 아버지! 아버지!”
무룡은 아버지의 시신을 부여안고 통곡했다.
무룡의 두 눈에선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침나절이 저녁나절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무룡은 일어날 줄 몰랐다.
“우아! 우, 아버지! 아버지!”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무룡은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대장부는 울지 말라하셨죠.. 하지만 아버지! 소자 무룡은 대장부의 눈물이 헛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소자, 아버지 죽음 앞에 맹세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원흉을 찾아 원한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아버지!”
무룡은 웃옷을 벗어 아버지 시신을 덮었다.
***
석양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을 무렵,
한 사나이가 지게를 지고 석양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가는 무룡,
그렇게 무룡은 석양 속으로 사라져 갔다..
슬픔에 젖은 별빛들은 흐릿한데
달빛은 여느 때보다도 밝구나!
달빛이 왜 밝은가 했더니
봉분(封墳)을 비추기 위함이더라!
나란히 세워진 세 개의 봉분(封墳),
방금 만들어 세운 봉분(封墳) 앞에 엎드려 오열하는 자는 바로 무룡이었다. 어깨들 들먹이며 오열하는 무룡의 눈물이 가슴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소자 무룡! 세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사무친 한을 기필코 씻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소자 무룡, 대장부답게 가르치심대로 따를 것입니다.”
굳건한 의지를 내보인 무룡이 천천히 일어서선 이미 잿더미로 변한 집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다경 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무룡이 무덤에 목례하곤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무룡이 떠난 빈자리엔 기다렸다는 듯이 달빛들이 내려와 한풀이를 하듯 너울너울 춤을 췄다.
----------계속
^(^,
열심히 산다는 것은 날마다 행복을 심는 일이다.
긍정의 삶으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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