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 뒤쪽으론 깎아지른 암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누구도 타 넘을 수 없는 천혜의 암벽이었다.
그런데 딱 한 곳 비밀 통로가 하나 있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통로는 덩치 큰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였다.
자영은 그 통로를 지나 암벽 뒤쪽으로 나왔다.
삐죽삐죽 칼바위들로 이루어진 돌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암벽 통로를 막 벗어나면 온천수가 샘솟는지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주위는 평평했고 동글동글한 몽돌들이 깔려있었고,
주위는 들짐승들조차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자영이 맘 놓고 목욕을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사르륵, 사르륵,
연못 앞으로 다가간 자영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자영의 옷 벗는 소리만이 주위에 늘어선 바위들을 일깨웠다. 그렇게 매미 허물 벗듯 자영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수련(睡蓮)을 본 듯 눈이 부셨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바위들까지 고개를 돌리며 숨을 죽였다. 긴 흑발이 미풍에 하늘거렸다. 가는 목선을 타고 유연하게 굽은 어깨선은 가냘프다 못해 비 맞은 한 마리 새 같았다. 그 아래로 잘록한 허리를 받치고 있는 뽀얀 엉덩이는 마음까지 설레게 했다. 그리고 긴 다리의 곡선을 따라...
자영은 천천히 온천물을 뿌려가며 몸 구석구석 씻기 시작했다. 한 번씩 손을 뻗어 긴 머리를 위로 빗어 올릴 때는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젖무덤이 언뜻언뜻 드러났다가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렇듯 여유롭게 목욕하는 자영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때 어떻게 이곳까지 숨어들었는지 자영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자가 있었다. 그 자는 연못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 뒤에 숨어서 음흉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영은 자신을 훔쳐보는 수상쩍은 인물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물방울을 튀겨가며 목욕에 열중이었다.
불청객인 수상쩍은 인물은 청건에 청의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음충맞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영의 중요 부분을 훔쳐보며 침을 꿀꺼덕 삼켰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쯤 되었을 헌칠한 청년이었다. 오관이 뚜렷하고 몸집 또한 건장했다. 또한 청년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 기도도 만만치가 않아 보였다.
‘음, 천하절색이다. 내 이제까지 강호를 누비고 돌아다녔어도 저만한 낭자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낭자가 태궁의 손녀라니? 그래 잘하면 늙은이를 끌어들일 수도 있겠군. 암, 눈앞에 있는 떡을 먹지 않고 지나친다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지, 낭자를 이용하는 수밖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청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낭자, 말만 잘 들으면 평생 호강을 보장하겠소. 낭자가 내 뜻을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오.’
중얼거린 청년이 언제 몸을 움직였는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졌던 청년이 불시에 자영이 벗어놓은 옷 옆에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자영은 청년이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낭자! 놀라지 마시오.”
자영은 별안간 사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자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며 돌아섰고,
그 순간 자영의 눈부신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악! 누 구?”
자영은 비명을 지른다고 질렀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모기소리만도 못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알몸을 파렴치한인 낮선 사나이 앞에 내보였다는 사실까지도 몰랐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자영은 몸을 가리는데 급급했다.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자영은 젖무덤을 감싼 채 연못 속에 쪼그리고 앉아 사나이를 노려봤다.
목소리마저 덜덜 떨려 큰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낭자, 놀라셨다면 내 사과하리다. 하지만 낭자의 아름다운 몸매를 다 살펴본 상태니 너무 내외는 하지 마시오.”
청년이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 저런 개 같은 놈! 내 네놈을 단번에 쳐 죽일 테다. 으, 무룡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몸인데, 이젠 무룡이를 어떻게 봐, 죽일 놈! 내 죽어도 용서치 않을 것이야,’
자영은 물에 기폭이 일 정도로 치를 떨었다.
“이미 다 봤다. 너 오늘 잘 만났다. 네 놈이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파렴치한 놈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자영은 청년을 노려보며 암암리에 공격할 기회를 찾았다.
“그 몸으로 뭘 어쩌겠다는...”
“이얏! 받아랏!”
휙! 슈슉!
퍼펑!
청년이 한 발짝 다가서며 입을 연 순간이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자영의 나신이 물을 차고 날아올랐다.
그 순간 자영의 손에서 강력한 장풍이 청년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어서 청년이 있던 자리에 미미하지만 손바닥 자국이 그린 듯 나타났다.
그 여파에 옆에 있던 자영의 옷이 찢어져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장풍이 청년을 덮쳐갔을 때는 청년은 이미 그곳에서 사라진 뒤였다.
만약 청년이 장풍을 그대로 맞았다면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낭자! 이러면 피차 곤란하지...”
청년은 3장쯤 떨어진 바위에 서서 인상을 써댔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몸을 피하는 바람에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계집 하고는 성깔이 있으니 더욱... 어디 살살 놀려볼까...? 아니지, 태궁 늙은이가 싸움 소리를 듣고 달려온다면 이로울 것이 없다. 그냥 제압해서, 아니지 아니야! 그래 이럴 때 써먹으려고 가지고 다녔던 것이 있었지, 어디 운우지락(雲雨之樂)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마...’
사나이가 음흉한 눈빛으로 자영을 쓸어봤다.
자영은 아연했다.
단번에 쳐 죽일 요량으로 전력을 다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나신을 다 내보인 꼴이 되고 말았다.
자영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흐흐, 낭자의 몸은 진정 천하절색이요. 눈이 부셔서 쳐다보지도 못하겠소이다.”
“죽일 놈!”
자영은 화들짝 놀래 연못으로 날아들었다.
너무 분하여 일시 옷을 벗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자영이었다.
“낭자! 어떻소, 우리 조용히 대화로써 감정을 풀어 봅시다.”
“너 같이 파렴치한 놈과 무슨 얘길 한단 말이냐! 냉큼 이곳에서 사라져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은 이곳을 살아서는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자영 낭자! 태궁 어르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요, 그러니, 화내지 마시오, 이래 봐도 나는 남자 중에 남자요. 아셨소!”
사나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자가, 내 이름은 고사하고 할아버지를 알고 있다니, 분명 무슨 일이...? 이 자를 살려 보내서는, 살살 달래서...’
자영은 청년을 달래다가 재차 손쓸 결심을 했다.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다니 좋아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는지, 이곳에 온 용건을 말씀해 보세요,”
“자영 낭자! 나는 우호적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낭자가 공연히 화를 낸 것이지 내 잘못이 아닙니다.”
‘쳐 죽일 놈! 네놈의 속셈이 뻔 하거 늘...’
자영은 놈을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었으나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이 난관을 어찌할지 정말이지 울고만 싶었다.
“알았어요. 우선 저 옷이라도 가져다주세요.”
“어이구, 이거 엉망이 되었소이다. 내 아주 좋은 옷으로 한 벌 해드리리다. 우선은 이 옷이라도 입으시오.”
‘으, 이번엔 네놈을--’
일순 자영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그래도 괜찮으니, 이리 주세요.”
“알겠소이다. 그럼,”
“......”
‘이때가 네년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다. 흐흐-’
청년은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한발 다가서더니 냅다 옷을 집어던졌다.
휙-
“이 무슨 짓, 이런 죽일 놈! 무슨 짓거리를 한 것이냐!”
자영은 청년이 옷을 줄 때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청년이 옷을 던지며 음분을 자영의 얼굴에 확 뿌렸다.
일순, 자영은 불길한 생각에 숨을 멈췄다.
그러나 그때는 숨을 들이쉴 때라 이미 음분을 들이마신 후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래도 끝은 있었다.
청년은 잽싸게 옷을 챙겨 입고는 자영을 내려다봤다.
자영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내,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야! 절대로 두고 봐!’
자영은 이성을 찾았다.
그러나 감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저히 청년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영은 이를 갈았다.
지금 자영의 심정은 혀를 깨물고 칵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파렴치한을 살려두고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자영 낭자! 날이 어두웠소. 앞으로 한 달 안에 만화곡을 정식으로 방문할 것이니 기다리시오. 그리고 낭자, 나는 천태일이라 하오. 기억해 두시오. 그리고 낭자, 우리는 부부지연을 맺은 것이오. 그리 아시고 방문할 때 정식으로 뵙시다.”
말을 마친 청년은 바람처럼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천태일이라 불린 청년의 수법은 신출귀몰한 수법이었다.
청년이 사라지고 잠시 후 눈을 뜬 자영은 너무 억울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자영의 눈에서는 한 맺힌 핏빛 불꽃만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훗날의 일은 하늘만 알 것이었다.
계곡은 어둠에 잠겼다.
그 어둠을 뚫고 걸레쪼가리를 걸친 자영이 암벽 안으로 사라졌다.
자영이 사라지자 바람만 계곡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이 발광했던 바닥엔 처녀를 잃었다는 징표인 처연한 앵화(櫻花)만 붉게 얼룩져있었다.
그것을 차마 쳐다보기가 민망했던지 바위들도 고개를 돌렸고 바람도 비껴 지나갔다.
----------계속
^(^,
창작은 상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긍정의 응원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모두 긍정의 삶으로 파이팅!
'유정만리(有情萬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6화 (0) | 2023.08.18 |
---|---|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5화 (2) | 2023.08.17 |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3화 (0) | 2023.08.14 |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2화 (0) | 2023.08.13 |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1화 (0) | 202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