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만리(有情萬里)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5화

썬라이즈 2023. 8. 1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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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바람은 쌀쌀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데 샛별만이 유난히 반짝였다.

 

무룡은 화덕에 불을 지피고 약탕기를 그 위에 정성스레 올려놨다.

그리곤 싸리비를 들고 마당이며 길을 깨끗이 쓸었다.

길을 다 쓴 무룡은 팔을 걷어붙이며 장작 팰 준비를 했다.

 

“무룡아! 오늘은 내가 장작을 팰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무슨 일은, 오늘 만화곡에 가기로 했지 않느냐? 그러니 일찍 서둘러라, 너무 늦지 않게 다녀와야 한다.”

“오늘 꼭 가야 합니까?”

“스승은 부모 이상이라고 말하지 않더냐! 오늘은 선인을 꼭 찾아가 뵙게 하라고, 네 어미가 어젯밤에 말을 하더라.”

 

사실 태궁은 무룡의 스승은 아니다.

그러나 무룡의 부모나 무룡은 태궁을 스승처럼 생각했다.

태궁의 말은 한마디라도 버릴 것이 없었다.

특히 무룡에게 은연중 던지는 말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들뿐이었다.

무룡은 알게 모르게 무공을 비롯한 처세술까지 태궁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제자를 삼겠다든지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래도 태궁과 무룡은 스승과 제자 그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아버지! 어머니 탕약 꼭 챙겨 드리세요.”

“그런 걱정은 말거라!”

 

무룡은 어머니를 뵙고 곧바로 떠날 차비를 끝냈다.

그때 만복철이 배웅하러 나섰다.

 

“무룡아! 네 어미가 서찰을 써놓은 것 같더라!”

“아버지! 벌써 챙겨서 넣었습니다. 어머니!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닐 잘 보살피세요. 빨리 다녀올게요.”

“알았다. 잘 다녀오너라!”

“......”

‘무룡아! 네 어미가 아무래도 며칠 못 살 것 같다.’

만복철은 멀어지는 무룡을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무룡은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멀리 초옥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룡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봤다.

만복철도 아들이 산등성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

 

만화곡은 조용했다.

초막 앞 평상엔 태궁과 소연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태궁은 풍모에 잘 어울리게 청색장포를 걸쳤으며 청건을 썼다. 소연은 오늘따라 화사한 연분홍색 옷을 입고 머리는 가지런히 틀어 올려 옥잠(玉簪)을 꽂았다. 그리고 분칠을 했는지 뽀얀 얼굴이 더욱 뽀얗게 보였고, 연지를 발랐는지 붉은 입술이 더욱 붉게 보였다. 소연도 여인이기에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情人)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소연아! 자영이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벌써 일어났을 애가 오늘따라 늦잠을 다 자는구나!”

“할아버지! 자영이가 이상하긴 했어요.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옷이 보기 싫었다면서 발기발기 찢어진 옷을 입고 들어왔었어요. 그리곤 이제까지 이불만 덮어쓰고 잠만 자네요. 불길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죠? 할아버지!”

“그런 일이 있었느냐? 음, 별일은 없었을 것이다.”

태궁은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론 걱정이 많았다.

요즘 들어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무룡이는 오겠지요?”

“무룡이가 그리도 좋으냐?”

“그런 게 아니라...”

“네 짝으로는 무룡이 놈이 최고의 배필이지, 그럼 소연아! 마중을 나가 보거라! 지금쯤 입구에 들어섰을 것이다.”

“정말 예요.”

소연은 대답과 동시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허허- 그리 좋을까,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자영아, 네가 무룡이를 좋아하는 줄은 안다. 그러나 부부지연을 맺는다는 것은 인연이 있어야 하거늘, 자영아, 여자란 자고로 사내대장부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어선 아니 된다. 나는 네가 정말이지 걱정이로구나.”

혼잣소리로 중얼거린 태궁의 얼굴엔 뜻하지 않게 어두운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무룡은 빠른 걸음으로 온다고 왔지만 아침나절이 다 되어서야 만화곡 입구에 도착했다.

무룡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송송 맺혔다.

 

“무룡아, 반 가 워...”

소연은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무룡을 놀래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막상 무룡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말만 더듬거렸다.

 

“소연아! 오래간 만이다. 할아버진...?”

“네가 올 거라면서...”

“그랬구나, 가자! 할아버지에게 전해 드릴 것도 있고...”

무룡은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연은 입을 씰룩거리며 무룡의 뒤를 따라갔다.

 

‘일부러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제대로 봐주지도 않고, 오늘 혹시, 어머님 병환이...’

소연은 평상시처럼 반갑다는 인사도 옷이 예쁘다는 말도 없이 앞서가는 무룡이 밉기도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 병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무룡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겨울에 만개했던 국화들은 시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봄에 피는 국화들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맘껏 햇살을 머금었다.

그중 성질 급한 국화는 수줍은 듯 웃음을 피워냈다.

그러고 보니 만화곡 화원은 사시사철 국화꽃이 진적이 없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태궁의 원예 솜씨는 가히 신화경(神花警)에 들었음이었다.

 

추운 겨울에 피는 국화는 설국(雪菊)이라 불렸다. 봄에 피는 국화는 춘국(春菊)이요. 여름에 붉게 피는 국화는 홍국(紅菊), 가을에 피는 국화는 추국(秋菊)이라 불렀다. 이렇듯 일 년 내내 국화꽃이지지 않도록, 그것도 네 종류의 국화를 절묘한 수법으로 심어놓은 화원은 만화곡뿐일 것이다.

 

킁킁,

무룡은 국화향기를 맡으며 초막으로 다가갔다.

태궁은 다가오는 무룡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봤다.

 

“할아버지! 무룡 인사 여쭙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왔느냐! 따라오너라!”

“......”

태궁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무룡의 인사를 받자마자 초막으로 들어갔다. 무룡도 소연에게 씩 웃어 보이곤 할아버지를 따라 초막 안으로 들어가고, 무룡의 미소를 접한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소연은 잠시 정신을 놓고 섰다가 차를 준비하러 다른 초막으로 향했다.

 

태궁과 무룡은 괴목(槐木) 탁자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무룡은 자리에 앉으며 어머니가 할아버지께 올리라는 서찰을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태궁은 말없이 서찰을 집어 들었다.

 

‘운명하실 때가 되신 게지...’

태궁은 서찰을 집어 들며 불길한 생각을 했다.

 

선인께 올립니다.

거듭 감읍하오며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선인께 밝혀 둘 것이 있습니다. 아직 무룡에게는 비밀에 부치고 있습니다만,

선인께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무룡의 친부모가 아닙니다.

 

제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밝힐 생각입니다. 그 후가 걱정이라서 선인께 여쭙니다.

무룡에게 가문에 대한 복수와 부모의 원수를 갚도록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심히 두렵고도 두렵습니다.

선인께서 답을 주시면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부디 해답을 일러주시길 바라오며...

만복철, 조추월, 拜上

 

태궁은 서찰을 접은 뒤 눈을 지그시 감곤 말이 없었다.

소연은 벌써부터 들어와 있었으나 할아버지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

무룡 역시 잔뜩 긴장해 있었다.

 

대략 반각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태궁이 가만히 눈을 뜨며 무룡의 얼굴을 직시했다.

소연은 할아버지가 눈을 뜨자 얼른 탁자로 다가가 찻잔을 내려놨다.

 

“할아버지! 설국차(雪菊茶)에요,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오냐! 소연이는 지필묵을 준비해라!”

“네, 할아버지!”

“무룡아! 설국차다. 마셔보아라! 맛이 그만이다.”

“예, 할아버지!”

“......”

태궁은 곧 무어라 말할 것 같더니, 말없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무룡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면서도 묻지는 못했다.

대략 반각쯤 지났을 것이다.

차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던 태궁이 눈에 힘을 주곤 입을 열었다.

 

“무룡아! 그동안 네가 배운 것이 무엇이냐?”

“정의(正義)와 인의(仁義)를 중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뿐이냐?”

“정의와 인의를 중시하려면 무엇보다도 힘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럼 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많이 부족하지만 정의와 인의를 중시 여기면서 바르게 살아가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무룡의 목소리엔 굳은 의지가 배어 있었다.

“무룡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단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어떤 일에 말려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악인의 길이든 선인의 길이든,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는 것이 인생사란다. 특히 약자들이 유혹에 잘 빠진단다.”

“할아버지! 저는 잘 이해가...?”

무룡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동안 네게 건네주었던 비급들은 탐독을 끝냈느냐?”

“예, 할아버지! 비급이 필요하시면 가져다 드릴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 그 비급 중에 마공비록(魔功秘錄)이란 것이 있었더냐?”

“예, 있었습니다.”

일순 태궁의 눈에 곤혹의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래, 그것을 다 읽어보았겠지, 느낀 점이 무엇이더냐?”

“패도(覇道)적이고 가공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사용자의 심성에 따라 옳게 쓰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라! 옳게 쓰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단 말이지...? 음, 그 연유를 말해 보거라! 네 생각 그대로 말이다.”

태궁은 경악하듯 놀랐으나 내색은 못했다.

“할아버지! 이건 제 생각입니다.”

“알았느니, 네가 느낀 바를 솔직히 말하면 된다.”

“......”

무룡은 어찌 말하는 것이 좋을지 갈피를 못 잡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마공비록은 분명 악마의 무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공비록의 마공을 익히게 되면 마성이 침투하여 선한 자도 악인이 된다는 것인데, 그 마성을 제압하면 오히려 마공이 선공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공비록에 기술된 대로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것만 익히고 부수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마공비록도 쓸 만한 비급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

무룡은 침착하게 자신이 느꼈던 바를 차분하게 말했다.

 

태궁은 무룡의 말을 들으면서 몇 번이고 깜짝깜짝 놀랐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경이적인 눈빛으로 무룡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나도 그런 단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거늘, 무룡 말대로 정녕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태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무룡아! 마공을 익히려면 처음부터 하나하나 익혀야 하거늘, 어찌 핵심만 익힐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나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구나,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줄 수 있겠느냐?”

“할아버지! 그것은 꼭 꼬집어서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마공을 선공으로 만드는 게 의외로 쉬울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 되었다. 다른 비급들도 검토를 해 보았느냐?”

“예 할아버지! 다른 비급들도 한 번씩은 다 읽어봤습니다. 나름대로 독창적이고 심신단련에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무룡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이럴 수가, 그동안 내 눈이 멀었었다. 기재인 줄은 알았으나, 이렇게 특출할 줄은 진정 몰랐다. 천추(千秋)에 한을 남기겠구나! 앞으로 보름, 시간이 없다. 어쩌겠는가, 소연은 무룡에게 보내고 자영은 데리고 떠나야겠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룡의 얘길 진지하게 듣던 태궁이 눈을 뜨더니 허허롭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장하구나! 앞으로는 무공을 익히되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손을 쓰지 말거라! 특히 선한 일에만 사용하되 매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리고 한 가지 더 일러두마! 무룡아! 무공을 배울 땐 어떤 무공이던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느니, 눈을 감고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경지에 달했을 때가 진정으로 배운 무공을 대성했다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오늘 뵈오니 안색도 안 좋으시고, 어디 편찮으신 것은...”

“그렇게 보였느냐, 나는 괜찮다. 너희들은 내가 몇 자 적을 동안 산보나 하고 오너라!”

“예,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 나중에 부르세요.”

무룡은 소연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무룡은 할아버지가 전에 없이 많은 질문을 한데 대해 잠시 생각을 해 봤다.

특별한 의구심이 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의 서찰 내용 중에 자식을 맡기겠다는 말이 쓰여 있지는 않았을까 ,

그런 의구심이 들었을 뿐이었다.

 

태궁은 무룡을 처음 봤을 때부터 눈독을 들였었고,

만복철에게 아드님을 제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만복철은 그 얘길 마누라인 조추월에게 했고,

조추월은 무룡을 불러 선인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중을 물었다.

그때 무룡은 공부도 좋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고 자신의 뜻을 단호히 밝혔다.

그 바람에 무룡은 3일에 한 번씩 만화곡엘 다녀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무룡은 만화곡에 있는 서적들까지 한 번씩은 다 읽어봤다.

그리고 태궁이 특별히 챙겨준 서적들은 집까지 가지고 와서 공부를 했었다.

그때부터 무룡의 기초적인 무공이 탄탄하게 다져지기 시작했다.

 

----------계속

 

오늘도 즐겁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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