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만리(有情萬里)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3화

썬라이즈 2023. 8. 14.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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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조추월의 죽음

오대산에서 제일 험하고 절경으로도 으뜸인 천지봉(天池奉)이 햇살아래 위용을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때는 상춘지절(上春之節), 만물이 소생하는 초봄이었다.

 

천지봉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능선,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어린 풀들이 내리쬐는 햇볕을 탐하여 동쪽으로 머리를 들이밀곤 자기들 말로 싸움질을 해대고 있었다. 잡목들은 잡목들대로 자기가 먼저 잎을 피우겠다고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고 마구마구 실랑이질을 해댔다. 그래도 듬직한 소나무들은 아우님 먼저 형님먼저 양보를 해가며 늘어진 가지를 양껏 벌려 기지개를 켰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파란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넣듯 제멋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능선 풀밭에는 대자로 누운 한 청년이 수시로 변하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누워있던 청년이 천천히 일어나 통나무가 산처럼 실린 지게로 걸어갔다.

청년은 깨끗한 황의를 입었으며 머리띠를 질끈 묶어 긴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잘생긴 청년은 옷은 남루했으나 옥골선풍(玉骨仙風)이요, 헌헌장부(軒軒丈夫)였다.

 

“무룡아! 무룡아! 잠깐만 있어봐! 무룡아!”

 

청년이 막 지게를 지려고 무릎을 구부리는 순간이었다.

한 여인이 능선을 치달려 올라오며 손을 흔들어 댔다.

 

“휴우- 힘들어,”

“자영이 네가 어쩐 일이냐? 이곳까지 날 찾아오게...”

분홍색 경장차림의 여인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다가왔다.

청년이 지게를 지다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어이구 숨차, 무룡아! 할아버지가 너를 데려오래!”

“할아버지가...?”

“그동안 네가 자주 안 오니까, 심심해서 죽을 뻔했어,”

여인이 엉뚱한 말을 해댔다.

“자영아! 할아버지가 무슨 일로 부르셨는데...?”

“그건 나도 몰라!”

 

분홍색 경장차림은 여인에게 잘 어울렸고 굴곡진 몸매를 뚜렷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여인의 나이는 방년 18세쯤 되어 보였으며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따로 없었다.

일견해 보면 여인과 청년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렇지만 여인의 눈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자영아! 앞으로 이삼일은 할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하게 됐어, 지금 어머니께서 많이 아프시거든, 할아버지께는 말씀을 잘 드려라. 그럼 나중에 보자!”

“어머니가...”

무룡이 대꾸도 없이 지게를 지고 능선을 내려가자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무룡아!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난 널 보려고 삼 십리 길을 달려왔는데, 바보! 그래 너 잘났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소연이는 아니야! 너는 내 꺼야! 내꺼...!”

자영은 멀어져 가는 무룡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렇게 악을 쓰듯 떠들어댄 자영은 무룡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때서야 능선을 떠났다.

 

무룡이 만화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5년 전이었다.

세월이 무상하듯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소년이었던 무룡은 헌헌장부가 되었다.

그리고 예쁘고 귀엽던 자영이도 몰라볼 정도로 성숙한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

 

하늘을 찌르듯 서 있는 열두 그루의 적송은 아담한 초옥(草屋)을 감싸듯 늘어서 있었다.

활짝 열려있는 싸리대문과 나지막한 담은 넉넉한 시골인심의 정취를 풍겼다.

담 옆엔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붉게 물든 해가 서쪽 산등성으로 넘어갈 무렵,

통나무를 산처럼 짊어진 무룡이 노을을 등지고 초옥으로 걸어왔다.

탕약 달이는 냄새가 심하게 후각을 자극했으나 무룡은 담담하게 통나무를 부리곤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 다녀왔습니다.”

“늦었구나, 그런데 무슨 나무를 그리 많이 해왔느냐?”

“많기는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들어가 보거라, 내내 네 말만 했단다.”

 

무룡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호롱불이 밝혀진 방안엔 조추월이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조추월은 방으로 들어오는 무룡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해댔다.

 

“어머니! 좀 늦었습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무룡은 어머니 옆에 바짝 다가앉으며 마른 장작 같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괜찮다. 이 세상에서 우리 아들 같은 효자는 없을 것이야, 그런데 아들아, 이 어미는 오래 살지는 못할 게다. 그동안 어미는 아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아들아,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조추월은 힘들게 말하면서도 무룡의 손을 연방 쓰다듬었고, 얘기를 듣는 무룡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머니! 그래도 소자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어머니!”

억지로 눈물을 삼킨 무룡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들아, 그동안 네게 가르친 것이 천리(天理)를 어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능력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것이 천리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능력을 개발하고...”

“어머니! 어머니 말씀은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 소자 걱정은 마시고 힘이 드시니 말씀을 그만하세요. 그런데 어머니, 탕약은 제시간에 드셨습니까?”

무룡은 목이 메었다.

“이 어미는 저녁도 먹었고 탕약도 먹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 배고프겠다.”

 

“무룡아! 문 열거라, 상 들여간다.”

“예 아버지!”

 

무룡은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밥상엔 무룡이 좋아하는 꿩고기를 넣어서 끓인 국이 놓여있었다. 무룡은 아버지가 차려온 밥을 눈물을 삼키며 먹었다. 밥을 적게 먹거나 입맛이 없다고 하면 어머니가 서운해할까 봐, 무룡은 입맛이 없었으면서도 맛있는 것처럼 밥을 먹었다. 밥은 푹푹 퍼서 먹었고 국도 후루룩 후루룩 소리가 나게 마셨다.

 

사실 조추월은 병환으로 누운 것이 아니었다.

세월 탓인 노환 때문이었다.

조추월은 반년 전서부터 기력이 떨어지고 먹는 음식까지 신통치 않더니 끝내는 몸져눕게 되었다.

 

무룡은 어머니가 노환으로 눕자 어찌하면 어머니의 건강을 회복시킬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효도를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때부터 무룡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지런을 떨었다. 새벽에 일어나 산속을 헤매며 약초를 캐왔고 나무도 혼자서 다 했다. 특히 늙은 아버지도 어떻게 될까 염려하여 힘든 일은 아예 못하게 말렸다.

 

“아들아! 그만 건너가거라!”

“그런데 어머니, 모레쯤 만화곡에 다녀오겠습니다. 태궁할아버지가 찾는다고 자영이가 왔었습니다.”

“그랬구나, 이 어민 걱정 말고 다녀오너라!”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무룡은 밤새도록 어머니 옆에 앉아있고 싶었다.

하지만 엄격한 규칙 때문에 순순히 물러나왔다.

 

***

 

국향이 가득한 만화곡으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초막 앞에 놓여있는 평상엔 선풍도골(仙風道骨)풍의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노인은 독서삼매경에 빠진 듯 서책을 넘기는 손 외에는 자세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때 주위가 환해질 정도로 절세가인인 한 낭자가 평상 앞으로 걸어왔다.

낭자는 찻잔을 담은 소반을 평상에 내려놓으며 노인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할아버지! 오늘도 그렇게 앉아만 계실 건가요.”

“소연아! 무룡이가 걱정되느냐?”

“무룡이 어머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 하기에,”

“진정 그것뿐이냐?”

“할아버진, 저 보다도 할아버지가 무룡이를 더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소연이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렇게 보였느냐? 허허!”

태궁도 보던 서책을 덮으며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소연의 나이 19세,

누가 봐도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 칭송할 만한 미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소연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늘어진 청록색 옷을 입었다.

그리고 긴 머리는 가지런히 틀어 올려 분홍색 띠로 묶었고 옥색 비녀를 꽂았다.

특히 반듯한 이마와 오뚝한 코, 잘 익은 사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사슴처럼 긴 목선이 아름답다 못해 처연해 보였다.

 

소연은 가져온 청자찻잔을 할아버지 앞에 아주 예의 바르게 내려놓았다.

찻잔에 담긴 차는 붉은빛을 띠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마도 국화꽃으로 달인 차 같았다.

 

“어디, 이번 차 맛은 어떤지 볼까...?”

태궁은 소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 한 모금 마시곤 맛을 음미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윽한 국화향기가 입 안 가득히 맴돌았다.

 

“할아버지, 어떠세요.”

“음, 맛이 한결 좋아졌다.”

“삼 년 숙성시킨 거예요. 그런데 할아버지!”

“또 무룡이 얘기냐?”

“그것이...”

 

소연은 누가 뭐래도 할아버지가 무룡이의 어머님 병환을 치료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속상했다.

태궁 역시 소연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이참에 바른말을 해줄 생각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연아!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단다. 무룡이 어머님께서 편찮으신 것은 노환 때문이다. 그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단다. 네 생각엔 내가 죽을 사람도 살리는 신의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가 않단다. 무릇 인간은 수명대로 사는 것이란다.”

“그러면 무룡이 어머님은 돌아가시게 되나요,”

“그렇게 되겠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치인 것을...”

“그럼 할아버지! 무룡이를 제자로 삼으실 건가요?”

소연은 평상시 같지 않게 따지듯이 질문을 해댔다.

“오늘따라 우리 소연이가 딴 사람 같구나! 소연아, 무룡이가 마음에 드느냐? 어디 네 생각을 들어 보자꾸나.”

 

태궁은 무룡을 생각하는 소연의 진심이 무엇인지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보니 내색은 못하고 손녀인 소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이 기회라 생각한 태궁은 소연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진지하게 되물었던 것이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나도 좀 들어요.”

언제 나타났는지 자영이 토라진 목소리로 대화를 끊었다.

“어디를 갔다 오니, 국화주 담는 것 좀 도와주지 않고...”

평상시 같았으면 웃으며 말했을 소연이 오늘따라 목소리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난 그런 것은 하기 싫다고 했잖아! 그렇지 할아버지...”

“이놈 봐라! 뭐 묻은 놈 화낸다더니 네가 그렇지 않느냐!”

“할아버진, 언제나 언니 편만 들더라! 난 목욕이나 갈래...”

자영은 입을 삐죽거리며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우측 초막으로 들어갔던 자영이 목욕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자영은 할아버지와 소연을 힐끔 쳐다보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초막 뒤쪽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소연아, 자영이를 잘 돌봐 주거라! 너처럼 불쌍한 아이니라! 암튼 간에 자영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구나. 어려서부터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이 잘못이다. 누굴 탓하겠느냐! 다 이 할아비 탓이지...”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자영이가 보기보단 야무진 데가 있어요. 똑똑하고요.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될 거예요.”

소연은 느닷없는 할아버지 말씀에 의아했지만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소연이 네가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내일 정오쯤이면 무룡이가 올 것이다. 이젠 되었느냐?”

“할아버지는 괜히... 술독을 봐야겠어요,”

 

소연은 발개진 얼굴을 숙인 채 찻잔을 챙겨 좌측 초막으로 달려갔다.

그런 소연을 바라보는 태궁의 눈엔 안쓰럽다는 눈빛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초막 안,

대략 30개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오열 종대로 놓여있었다.

소연은 소반을 든 채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자꾸 웃음이 났지만 입을 꼭 다물었다.

 

‘무룡아! 어머님이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다. 내일은 꼭 올 거지,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으니 꼭 올 거야, 무룡아, 나도 모르겠어,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내가 무슨 생각을, 그래도 보고 싶어, 어디 아프지는 않겠지, 휴--”

소연은 일어서면 긴 숨을 내쉬었다.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애틋한 정이 무룡을 향해 마구 치닫는다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깨달았다.

그때부터 무룡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게다가 가슴까지 쿵쿵거려 진정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이것이 사랑의 열병이라는 것을 소연은 모르는 것 같았다.

 

청춘남녀의 사랑은 너무 빨리 달아올라도 후일을 기약 못하고,

긴 세월을 기다린다 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연이나 자영이가 무룡을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사랑일 것이었다.

 

----------계속

 

내일은 광복절, 태극기를 답시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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