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만리(有情萬里)

단야의 유정만리 1권 16화

썬라이즈 2023. 8. 18.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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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왔으면 날 깨우지는 않고 잘들 논다.”

언제 일어났는지 홍의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자영이 평상 앞에 서 있었다.

자영은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쌀쌀맞게 말을 내뱉었다.

“자영이도 집에 있었구나. 나는 할아버지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셔서, 너를 먼저 찾지를 못했다. 미안하다.”

무룡이 변명하듯 말했다.

“무룡이 너 정말, 그 말 믿어도 되지...?”

자영도 실없는 질문을 해댔다.

“그럼 믿어도 되지, 그래 여태 잠잤니...?”

“그래 늦잠 잤다. 무룡이 너! 따라와!”

자영은 톡 쏘아 붙이곤 앞장을 섰다.

“어딜 갈 건데...?”

“따라오라면 따라올 것이지...”

“응, 알았어! 소연이도 같이 가자!”

“빨리 오라니까! 뭐 해!”

자영은 초막 뒤로 돌아가다 말고 휙 돌아서서 눈을 흘겨댔다.

소연은 대답을 하려다 입이 딱 달라붙었다.

 

“소연아! 금방 다녀올게...”

무룡은 마지못해 자영을 따라가며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갔다가 와! 나는 점심이나 준비할게,”

“......”

‘무룡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소연은 무룡이 보이지 않자 부엌으로 향했다.

 

‘소연아! 미안하다. 자영이가 좋아서 쫓아가는 게 아니야, 동생 같아서, 그냥 잘 대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것뿐이야!’

무룡은 소연을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룡의 마음에 자리 잡은 여인은 소연이었다.

소연을 좋아하게 된 것은 5년 전 이곳에 왔을 때부터 느낀 감정이었다.

세월이 흘러가고 장래를 생각하는 나이가 되자 무룡은 정말이지 진지하게 소연과 자영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 봤었다.

그러나 소연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감정이 애틋하게 변해있었다.

“......”

무룡은 자영을 따라 암벽 통로를 벗어나 연못 앞에 서 있었다.

연못 옆엔 전에는 없었던 손바닥 자국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자영은 쪼그리고 앉아 자국에 손바닥 크기를 재보며 중얼거렸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자영은 이빨을 갈았다.

“자영아! 왜 그래 얼굴색이 영 아니다.”

“언제 내게 신경 썼다고, 그만둬,”

“너 이러면 그 예쁜 얼굴이 아주 미워진다.”

“치, 만약에 말이야 무룡아, 내게 불행한 일이 있었어도 넌, 나를 버리지 않을 거지, 약속할 수 있지...?”

“버리긴 누가 누굴 버려, 우린 남매 같은 친구 사이잖아, 무슨 걱정이든 말만 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말만 들어도 고마워 죽겠네. 그런데 무룡아! 너, 언니 좋아하지! 그렇지...?”

“그게 뭐, 좋아하긴 하지,”

 

자영은 멋쩍어하는 무룡을 흘끔 쳐다보곤 치를 떨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을 짐승으로 만든 자를 떠올리자 치가 떨렸고, 치욕에 독기를 품는 자영이었다.

 

‘자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무룡은 자영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 묻지도 못했다.

 

자영은 쪼그리고 앉은 채 한참 동안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자영이 무룡의 눈엔 안쓰럽기만 했다.

무룡은 자영이 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냐고 물었는지 다시 음미해 봤다.

그렇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무룡은 자영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룡이 좋아하는 사람은 소연이라는 것도 자영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영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무룡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정말로 난감할 뿐이었다.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까지 무룡은 자영 뒤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바보, 그만 가자고 하면 될 걸, 그렇게 순해 터져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 머저리, 바보!’

자영은 무룡을 보면 답답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무조건 사람만 좋았지 미련한 곰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무룡을 좋아하게 된 자신도 머저리 바보라고 욕했다.

 

“너 정말 바보니, 그냥 가자고 하면 되잖아! 아니면 혼자 가던지, 하여튼 똑똑하다고 할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 뭘 해! 바보가 따로 없는 걸,”

자영이 말없이 서 있는 무룡에게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무룡은 자영이 몹시 화나는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자영은 화가 나면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무룡에게 화풀이를 했었다.

무룡은 이러는 자영에게 정말로 무슨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자영이 너, 화나는 일이 있지, 그렇다면 나한테 다 풀어라! 내가 다 받아 줄게, 알았지 자영아!”

“바보, 내가 왜 화가 나냐! 아니지, 너를 보니까 바보 같아서 화가 난다. 왜 됐냐! 가자 배고프다.”

자영은 벌떡 일어나 꽥 소리치고는 암벽 통로로 사라졌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는데. 소연에게 물어봐야지...?’

무룡은 자영의 뒤를 급히 쫓아갔다.

 

 

식사 준비는 벌써 끝나 있었다.

자영과 무룡이 도착하자 소연은 소면을 접시에 담아 평상에다 차렸다.

여느 때 같았으면 무룡과 자영을 꾸짖었을 태궁이 말없이 소면만 먹었다.

 

태궁이 말이 없자 무룡이나 소연, 자영도 묵묵히 젓가락질만 해댔다.

그래도 무룡은 출출한 김에 소연이 퍼주는 대로 소면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아침을 거른 자영도 배가 고팠던지 소면 두 그릇을 거뜬히 해치웠다.

 

식사를 마친 태궁이 무룡을 데리고 초막으로 들어가고, 소연은 말없이 그릇을 치웠다.

그때 자영이 웃으며 나섰다.

 

“호호호, 언니, 차는 내가 준비할게, 그리고 언니, 화났으면 풀어라, 내 성질이 나쁘다는 것은 언니가 더 잘 알잖아...”

“얘는 누가 뭐라니, 우리도 한잔씩 하게 설국차로 준비해라, 요즘엔 국화차가 좋더라.”

“알았어, 언니!”

 

 

초막 안,

태궁과 무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무룡아! 이것을 가져가거라! 앞으로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께 올리는 답신이 들어있다. 어머니께 잘 전해 올려라! 그리고 무룡아, 너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었는데 번거로워 서찰로 준비했다. 돌아가거든 서책을 들춰 보거라! 그럼 더 늦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태궁은 무룡 앞에 책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가려고...”

“그럴 필요 없다. 어머니가 편찮으신데 밖에서 잠을 자서야 쓰겠느냐! 늦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가거라!”

“그럼 할아버지! 무룡이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사실 무룡은 어머니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어머니가 하루 자고 오라고 말했지만 편치 않은 마음에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태궁이 서둘러 돌아가라는 말을 하자, 무룡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할아버지! 차라도 한 잔 하고 가게 하시지, 그냥 가게 해요,”

“우리 자영이가 끓여 온 차구나, 그럼 차나 마시고 곧바로 떠나거라! 그런데 아무래도 네 어머님이... 무룡아! 안 되겠다.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예,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꼭 이럴 때 그런 얘기를 하세요. 무룡아! 그냥 가라! 할아버지 말씀은 틀리신 적이 없으셔!”

자영은 태궁에게 눈을 흘기고는 무룡을 재촉했다.

 

해가 서산으로 많이 기울었을 무렵,

무룡은 태궁과 소연, 자영의 배웅을 뒤로하고 만화곡을 떠났다.

 

그때 만화곡으로 선선한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고 장끼 두 마리가 화원으로 내려앉았다.

자세히 보니 까투리 한 마리가 꽃밭 사이를 살금살금 기고 있었다.

이런, 암놈은 한 마린데 수놈인 장끼는 둘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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