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6일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편하게 잠자는 손자를 보자 눈물이 글썽였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평온한 얼굴이다.
나는 안 여사에게 오늘은 손자 걱정은 말고 일찍 들어가 쉬라고 말했다. 원래 똥고집인지,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결국은 엄포를 놓듯 억지로 쉬게 했다.
오늘은 손자와 그동안 못한 얘기들을 나누며 오붓하게 지냈다. 모처럼 손자의 몸도 씻겨주었다.
한 번씩 꿈나라를 여행하는지, 손자는 즐거운 표정도 지었다가 어두운 표정도 짓는다..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땐,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 나름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을 지을 땐, 얼마나 무섭고 공포스러운 곳인지, 대신 꿈속으로 들어가 해소를 시켜 주고 싶은 심정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붙였다.
“할아버지도 어지간한 분이셨어, 고집도 세시고,”
대박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곤 다시 일기장을 넘겼다.
2017년 11월 17일
안 여사는 아침 일찍 병원에 왔다.
덕분에 편히 쉬었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참, 안 여사가 도시락을 싸왔다.
하루 쉬게 했다고 도시락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나는 누워 있는 손자 앞에서 음식 먹는 것을 삼가했다..
도시락은 휴게실에 가서 먹었다.
음식 솜씨가 좋아선지, 도시락은 정말 맛이 있었다.
“어라!”
차락, 차락, 차락,
한 장, 한 장, 일기장을 넘겼다.
2017년 11월 18일
오늘은 특별한 일 없었음,
2017년 11월19일
오늘은 아들 친구인 홍창선이 홍삼세트를 사 왔다..
아들처럼 내 건강을 끔찍이 챙긴다.
2017년 11월 20일
소라가 엄마를 보러 왔다가 갔다.
용돈이라도 줬으면 했는데...
친구가 찾아와 다음으로 미뤘다.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은 간략했다.
대박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였다.
“괴인 할아버지를 만났을 시점만 찾으면, 괴인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그 날짜에 쓰여 있을 거야, 그래 병원에서 2년, 집에서 1년,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죽음이 조건에 의한 죽음이었다면, 맞아 집에 돌아온 후에 벌어진 일일 거야, 그 죽음이 정말로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면 어떻게 하지...”
대박이의 추리는 거의 정확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집에 온 후에도 일기를 쓰셨잖아, 그렇다면 그 1년 동안 쓰신 일기장을...”
대박이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2019년도 일기장을 꺼냈다.
“음, 괜히 떨리네,”
대박이는 무슨 의식을 치르듯 일기장을 가슴에 안았다가 첫 장을 펼쳤다.
2019년 3월 1일
오늘은 삼일절 날이다.
삼일절 손자에게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태극기는 애국심을 담아서 달아야 한다.’
나는 만세운동의 의미를 생각하며 태극기를 달았다.
괜히 가슴이 짠하다.
손자 녀석은 깊은 잠에 빠졌다.
안 여사가 목욕을 시키듯 꼼꼼히 씻겨주었더니 개운했던 모양이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있자니 얼마나 답답하고 지긋지긋할까, 손자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내일은 용하다는 점집엘 가기로 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경로당 친구의 권유에 응했다.
2019년 3월 2일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날마다 금정산 고당봉에 올라가 천지신명께 빌고 내려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 시작이다. 오늘도 나는 이른 새벽 고당봉에 올라가 우리 손자 대박이를 살려달라고 천지신명께 빌고 내려왔다.
처음엔 이상한 늙은이 취급을 하던 사람들도 차츰 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응원을 해줬다.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공 씨와 찾아간 곳은 당감동 산 밑에 있는 한 점집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산신령 탱화가 걸려있고 그 앞에 제물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50대 무녀 앞에 앉아 탁자에 5만 원권 두 장을 올려놨다. 무슨 일인지 무녀는 내가 앉아서 돈을 올려놓을 때까지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헴,
한쪽에 앉아서 구경하던 공 씨가 인기척을 냈다.
그때야 무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녀의 얼굴은 겁에 질려있었다.
영감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습니다.
문제는 죽음으로 얻은 생명이...
생사를 어찌할까?
으으으
영감님, 소녀가 어찌할 소관이 아니옵니다.
부디 조용히 돌아가 주십시오.
복채도 가져가십시오.
이상하게 무녀가 겁먹은 얼굴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걸 보자 되레 내가 더 겁났다. 무녀의 말대로 나는 복채까지 들고 나왔다. 공 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안하단 말만 했다. 무녀의 말뜻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박이는 오늘도 꿈을 꾸고 있다.
언제쯤 꿈에서 깨어나듯 일어날까?
일기를 읽는데도 마음이,
“괴인 할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없으면 일단 건너뛰자, 그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내가 처리할 일이야,”
대박이는 조급함으로 산란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대박이는 다음 장을 넘겼다.
괴인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역시 괴인 할아버지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대박이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차락, 차락, 차락, 차라라라라락,
촤락,
별안간 대박이가 손을 멈췄다.
두툼했던 일기장이 대략 30여 장 남았다.
대박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대박이의 눈빛이 꽂힌 곳,
괴인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적발 노인이 말하길,’이란 글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히히 찾았다. 적발 노인,”
대박이는 적발 노인이 꿈속의 괴인 할아버지란 것을 대번에 알아봤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도 꿈속에서 괴인 할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할아버지가 괴인 할아버지를 어디서 만났든, 할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연유가 뭔지 그게 알고 싶단 말이지, 그 약속, 아니 조건이란 것이 뭔지 말이야,”
대박이의 말투에 힘이 실렸다.
------계속
^(^, 힘든 시기입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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