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억울한 죽음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중원 무림,
50년 전 사황련(四煌聯)과 정사 대전 이후 중원 무림이 이토록 평화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암중 세력이 긴 동면에서 깨듯 꿈틀거리고 있었으니, 중원 무림이 언제 폭풍에 휘말릴지 예측불허(豫測不許)였다.
그런 때에 정사 대전 이후 결성된 정도 무림의 태두 무림맹(武林盟)은 세월에 편승해 무사태평의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무사태평했던 무림맹은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서로 간에 세력다툼을 벌였다. 특히 맹주 직을 탐하는 자들의 불만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여기는 숭산 준극봉(峻極峰),
중원 오악(五嶽) 중에서도 명산으로 불리는 숭산, 그 숭산의 중앙에 자리한 준극봉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동쪽으로 태실봉(太室峯)이 서쪽으론 천년 사찰인 소림사를 품고 있는 소실봉(小室峯)이 운무(雲霧) 위로 아스라이 보였다.
준극봉 중턱에 자리한 작은 암자가 중천에 떠오른 태양 아래 한낮의 햇살을 못 이겨 졸고 있었다. 암자 앞쪽은 천길 벼랑이었고, 좌우 뒤쪽으론 천년 고송이 둘러서 있었다.
암자에서 내려다보니 넒은 길이 능선으로 이어졌고, 길은 이내 능선 넘어 고송들이 하늘을 가린 숲에서 끊겼다. 숲속 중앙이었다. 성(城)같은 커다란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여 채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들어선 장원은 바로 정도 무림의 태두라는 무림맹이었다.
소리도 없이 암자 문이 열렸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이 천천히 문밖으로 나와 절벽 아래에 펼쳐진 무림맹을 내려다봤다. 무림맹은 오월의 햇살 아래 그지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필이면 무림맹이 소림사가 있는 숭산에 있을까, 의문이긴 했다.
휘이잉- 휘이잉- 휘잉-
오월의 훈풍이 절벽을 타고 올라와 노인을 스쳐 지나갔다. 풍성해 보이는 청포가 바람에 너풀거리자 가슴까지 내려온 백염과 늘어진 백발이 휘날렸다. 마치 신선이 하강한 듯했다.
그때 암자를 향해 한 젊은 무사가 힘차게 치달려 올라왔다. 무사는 조심스럽게 암자마당으로 들어섰다. 준수한 이목구비에 총명해 보이는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노인 뒤에 공손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왔느냐?”
“예 사부님!”
“어허, 네놈이 큰일 낼 놈이로다.”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엄하게 꾸짖었다.
“맹주님! 사부라는 말이 입에 붙어서...”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냐? 네놈이 내 제자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이다. 이점 명심해라!”
“예 맹주님!”
“원명은 돌아왔더냐?”
“위사장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분명 진충원이 사황련과 연관이 있을 터, 제갈세가를 어찌한다. 장로들이 들고일어나기 전에 사황련의 발호를 밝혀야 하거늘, 앞으로의 중원 무림이 암담하구나!’
무림맹을 내려다보는 노인의 얼굴엔 잔뜩 그늘이 어렸다.
노인은 정사 대전 이후에 결성된 무림맹의 초대 맹주였다. 전대 무당 장문으로서 청산진인(靑山眞人)이라 불린 무림의 거두였고, 50여 년을 맹주로 활약 중이었다.
“충아! 장로들의 움직임은 어떠하더냐?”
노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노인의 면면이 드러났다. 백발을 가지런히 빗어 넘겼으며 청색 끈으로 상투를 틀었다. 어깨까지 늘어진 청색 끈이 백발과 함께 나부꼈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은 잔주름이 있기는 했으나 120세의 노인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동안(童顔)이었다. 게다가 눈에서는 세상을 꿰뚫어 보듯 밝은 빛이 일렁거렸다.
“맹주님! 곤륜파 도사들이 태청노사(太淸老師)를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차기 맹주에 대해...”
“다른 장로들은?”
“예, 남궁호천이 공동선인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한 시진 이상 지체한 것을 보면 깊은 얘기가 오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 특별히 보고 드릴 것은 없습니다.”
“음, 남궁호천이 욕심이 생긴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공동선인은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두고 보면 알 것이다.”
“그런데 맹주님!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겁니까?”
“글쎄다. 내려갈 일이 생긴다면 내려가야겠지, 아무튼 너는 장로들의 행보를 잘 감시하도록 하라! 그리고 내려가는 대로 대총관에게 전하라! 맹도들의 기강이 너무 해이해졌다고, 확실하게 기강 잡을 묘책을 강구 하라 전하라! 알겠느냐?”
“예 맹주님!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충이라 불린 청년이 암자를 떠난 직후였다.
길도 없는 좌측 숲속에서 봉두난발(蓬頭亂髮)의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누더기를 걸치고 구불구불한 용두장(龍頭杖)을 짚었으며 길게 늘어뜨린 허리띠엔 아홉 개의 결개가 매듭지어 있었다.
“소인, 주신개가 맹주를 뵈오이다.”
“방주! 내 오늘쯤 올 줄 알았네. 그런데 호로병이 없는 것을 보니 진정 술을 끊은 것인가?”
“주신개, 맹주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놈들의 발호를 막기 전에는 술을 먹지 않기로 작심을 했소이다.”
“결심이 대단하네. 일단 안으로 들어감세. 어험-”
주신개(酒神介), 거지들의 우두머리인 개방의 용두방주다. 검붉은 얼굴에 눈까지 토끼 눈처럼 붉은빛을 띠었다. 게다가 주름까지 쭈글쭈글한 것이 보기엔 맹주보다도 나이가 많은 듯 보였다. 그러나 맹주의 아들뻘인 88세다. 술이 있는 곳엔 어떻게 알고 끼는지 술 귀신이란 뜻으로 주신개라 불렸다.
-----계속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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