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이었다.
그동안 장원은 특별한 일 없이 평온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아침나절부터 장원 안팎이 시끄러웠다. 침울하고 살벌한 분위기가 장원에 잔뜩 드리웠다. 마치 억울하게 죽은 자가 있는 것처럼 초상집 분위기였다.
일단의 무사들이 살벌한 눈빛을 번뜩이며 마방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반쯤 거적에 덮인 한 구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살기를 피어 올렸다. 시신은 목이 반쯤 잘리는 검상(劒傷)을 입은 시신이었다. 검술의 고수가 아니라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예리한 검상이었다.
“물러서라! 대인께서 오신다.”
풍객이 장원을 나서며 소리쳤다.
십여 명의 무사들은 날렵하게 좌우로 정렬해 섰다.
진충원이 쌍노와 두 영무(影武)를 대동하고 현장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분기탱천했는지 백포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다.
“대인을 뵙습니다.”
무사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무사들은 쓱 훑어본 진충원은 말없이 시신을 내려다봤다.
‘음, 생각보단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였군. 쳐 죽일 놈! 감히 이 진충원의 심기를 건드렸단 말이지, 내 네놈을 꼭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똑똑히 알게 해 줄 것이다.’
시신의 목에 난 예리한 검상을 직시한 진충원의 눈에선 놀람과 분노가 일렁거렸다.
“시신을 갖고 온 자가 누군가?”
시신에서 눈을 뗀 진충원이 무사들을 쓸어보며 한기가 서린 목소리로 싸늘하게 일갈했다.
“대인! 소 소인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소상히 보고하라!”
작달막한 30대 무사가 나서자 쌍 노가 나섰다.
“대인, 새벽 순찰(巡察)을 돌기 위해 산에 올라갔다가, 길옆에 쓰러져 있는 위명을 발견했습니다.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즉시, 숲속을 샅샅이 뒤졌습니다만, 싸운 흔적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대인!”
“음, 흔적이 없었다.”
“예, 대인!”
“주인님! 다른 상처가 없는 걸 보면 일수(一手)에 당한 것 같습니다. 검상으로 봐서는 대단한 자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쌍노가 시신의 검상을 살피며 의혹 어린 투로 말했다.
“그래, 무슨 검법인지는 알겠는가?”
“수법은 횡소천군의 수법을 응용한 것 같기는 한데? 어느 검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그동안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거늘, 누군가가 염탐하러 왔었다면, 그러다가 순찰 중인 위명과 맞닥뜨렸다는 얘긴가, 음,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
진충원의 입술이 한차례 씰룩거렸다.
“쌍노! 일단 위명의 장례를 치러주도록 하라! 그리고 오늘부터 경계를 강화하고 순찰조를 3인 1조로 하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
‘클, 감히 주인님의 심기를 어지럽힌 자가 있다니, 누굴까? 위명의 무위도 만만치 않았거늘, 아무튼 기습에 당한 검상은 아니다. 분명 대치한 상태에서 일검에 당했다. 도대체, 도대체 어떤 놈일까, 내 눈을 속일 정도의 검법이라? 보통 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쌍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곤 무사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서둘러 장례준비를 하고, 소문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라! 순찰장(巡察長)은 나를 따라라!”
“예, 쌍노!”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던 걸출해 보이는 사나이가 쌍노를 따라 장원으로 들어가자, 무사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일꾼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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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랑의 거처인 별당은 밖의 일과는 상관없이 고요했다.
아름다움을 뽐냈던 매화꽃은 하나둘 떨어져 바람이 지날 때마다 노랑나비처럼 날았다.
여랑은 머리는 틀어 올려 옥잠화(玉簪花)를 꽂았다. 옷은 당의에 도화(桃花)가 수 놓인 장옷(長衣)을 입고 고요히 뜰을 거닐고 있었다. 사뿐사뿐한 걸음걸이에 끌리듯 옷자락이 너풀거릴 때마다 매화 꽃잎은 나비처럼 춤을 췄다.
세상에 절세가인(絶世佳人)이 따로 없었다. 약간 창백한 얼굴이 오히려 하얗게 빚어진 조각처럼 흠잡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심연처럼 깊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처연(悽然)한 듯, 보는 이로 하여금 설레게 했다. 특히 또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늘씬한 자태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모, 원세가 동굴에 갇힌 지, 오늘이 한 달째지?”
여랑의 우수에 잠긴 듯, 수심에 잠긴 듯한 검은 눈동자는 심연(深淵)처럼 깊었고, 목소린 애절함이 배어있었다.
“네, 아가씨!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몰골이 말이 아니겠지,”
“아마 엉망이겠지요.”
“그럴 거야, 살아있기는 할까?”
여랑은 문득문득 원세가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근심 걱정에 날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지금도 원세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뜰을 거니는 중이었다.
“아가씨, 그런 말씀은 안 하기로 했잖아요. 의원님 말씀대로 원세는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그만 들어가시지요. 아가씨,”
“유모 조금만 더 있다가,”
“어험-”
그때 조사의가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할아범! 오늘 어디 가신다고 했잖아요.”
“그럴까 했는데, 다음에 가기로 했습니다.”
“저 때문에 못 가신 건 아니지요.”
“그럼요. 아가씨!”
“유모! 할아범 하고 차 한잔하게 준비 좀 해줘요.”
“들어가세요. 곧 올리겠습니다.”
“할아범, 들어가요. 어서요.”
“그럽시다. 우리 담화나 나눕시다. 하하하--”
두 사람은 나란히 내청(內廳)으로 향했다. 내청으로 향하는 그들은 누가 보더라도 다정한 할아버지와 손녀였다.
-----계속
긍정의 힘으로 이겨냅시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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