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쳐진 내청, 두 사람이 탁자를 마주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청은 수수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고, 대나무로 만든 발엔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봄 풍경은 생동감이 넘쳤다. 유모는 마당을 거닐며 혹시라도 불청객이 올까 망을 봤다.
“아가씨! 소인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원세와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탕약을 올릴 때 뵙겠습니다.”
대략, 반 시진쯤 지났을 때 조사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두 사람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밤이 되자 살벌하기까지 했던 장원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하늘엔 처자의 뽀얀 엉덩이 같은 만월이 두둥실 떠 있었다. 그때 몇 마리 철새가 만월을 가르며 날아갔다. 고향을 찾아가는 걸까, 집 떠난 이들이 그리운 밤이었다.
여랑의 침실 창가로 은은한 달빛이 어리고 있었다.
창문이 열리며 월궁항아 같은 여랑의 얼굴이 나타났다.
“원세야, 오늘 할아범이---”
말끝을 흐린 여랑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여랑은 조사의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긴 여랑도 처음 듣는 얘기였고 가슴을 떨리게 만든 얘기이기도 했다. 여랑은 더 많은 얘길 듣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뤘다.
‘아가씨, 아가씨는 원음지체로 태어나셨습니다. 제가 의술과 천문을 볼 줄 몰랐다면 원음 지체 인지도 몰라봤을 것입니다. 아가씨께선 학문이 깊으시니 원음지체가 어떤 신체인지 아시겠지요.’
여랑은 할아범의 말을 듣고 일시 멍했었다.
원음지체로 태어난 사람은 현시대까지 없었다는 것이었고, 만약 태어난 자가 있다면 극음지기(極陰至氣)의 신체(身體)라 태어난 지 백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여랑에게 일어났음이었다.
여랑은 자신이 기억하는 세 살 때부터 곰곰이 따져봤다. 그 결과 할아범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삼 할아범이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여랑은 어려서부터 양기의 영약만 복용한 이유가 음기를 잠재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 아가씨, 원세가 아가씨와 천생배필이라고 한 말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원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함께 있으면 무조건 좋기 때문입니다. 원세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훗날 혼인을...’
“......”
‘아가씨, 아가씨와 원세 사이에 방해물이 많습니다. 어쩌면 인륜을 저버리는 그런 일까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아가씨께서는 원세를 떠나선 절대로 안 됩니다. 원세도 마찬가지지요.’
‘아가씨께선 원세가 돌아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앞일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아가씨, 원래 천운(天運)을 타고난 자는 하늘이 시험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점도 명심하세요.’
여랑은 할아범이 한 말을 되새기며 만월을 바라봤다.
그때 불현듯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8년 전 늦여름이었다.
매미가 요란하게 울던 어느 날,
어린 남자애와 계집애가 별당 뒤뜰에서 놀고 있었다.
‘나하고 노는 게 지겹지도 않니?’
‘아니요. 저는 아가씨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습니다.’
‘나, 저 매미 갖고 싶어.’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잡아드리겠습니다.’
매미를 잡겠다고 동백나무로 올라가던 남자아이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상처가 난 팔에서 피가 흘렀다. 남자아이는 아프기도 했으련만 발딱 일어나 다른 나무로 도망간 매미를 쫓아갔다. 계집애는 그러지 말라고 훌쩍거리며 말렸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씩 웃고는 계속 매미를 잡으러 다녔다. 그렇게 매미를 쫓아다니던 남자아이는 저녁 무렵, 끝내는 매미를 잡고야 말았다.
‘아가씨, 매미 잡았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남자아이는 쥐고 있던 매미를 내놓으며 바보처럼 씨~익 웃었다.
‘바보- 이게 뭐라고---’
어린 계집아이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짠하게 아팠었다.
그렇게 지나간 추억이 여랑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만월도 이를 아는 양 창가로 은빛을 뿌려댔다.
“원세야, 제발 몸조심해, 네가 돌아오면 할 말이 많아,”
만월을 바라보는 여랑의 눈에 굳은 신념이 어렸다.
“원세야, 저 달님은 내 맘을 알까?”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잘 지냅니다.’
“원세야!”
은은한 만월에 원세의 웃는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웃는 걸 보니까 기분 좋다. 그런데 왜 슬퍼지지,”
여랑은 눈시울을 훔치며 다시 만월을 쳐다봤다.
‘여랑아, 울지 마!’
웃고 있는 원세의 얼굴이 만월에 겹쳐졌다.
‘여랑아 울지 마!’
원세가 달래는 것 같았다.
“원세가, 내 이름을 불렀어, 고마워 원세야!,”
여랑의 두 눈에 맺힌 눈물이 달빛에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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