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장원의 한 허름한 전각이 은은한 별빛 아래 드러났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정원수들만 속살거릴 뿐, 전각 주위는 고요했다. 창마다 불이 꺼진 지 오래되었고, 오직 불이 밝혀진 방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그 방에서 흘러나오는 여인의 목소린 애절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비나이다. 부디 지아비를 무사 귀환케 도와주소서! 이 한목숨 거둬 가시고, 우리 원세를 살펴주소서! 빌고 또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부디 지아비를, 원세를, 빌고 또 비나이다.”
방안이었다.
고씨 부인이 동쪽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빌고 있었다.
얼굴은 몰라보게 수척했고 소복을 입었다.
고씨 부인은 아들 원세가 산으로 올라간 그날부터 천지신명께 빌었다. 오늘도 허드렛일을 하느라 지친 몸이지만 돌아오자마자 지아비와 자식을 위해 천지신명께 비는 중이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와 지어미들의 마음이 고씨 부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인의 정성만큼은 아닐 것이었다. 한목숨 버려도 좋다는 심정으로 비는 부인은 그동안 한 끼 식사가 고작이었다. 이는 자식이 굶어 죽을 판인데 어미로서 배불리 먹을 수도, 아니 목이 메어 음식조차 먹을 수가 없었음이었다. 한 끼라도 억지로 먹었던 것은 지아비와 아들을 꼭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희망 때문이었다.
꼬끼오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어느새 새벽이었다.
부인이 몇 번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다가 주저앉았다.
억지로 일어선 부인이 살며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 눈을 피하려는지 주위를 둘러본 부인은 동쪽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가 다시 절하는 부인, 누군가 보았다면 코끝이 시큰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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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는 암동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훤하게 드러나는 하늘로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유독 수심에 잠긴 어머니의 얼굴이 못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어머니, 못난 아들 때문에 상심이 크시지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말씀하셨지요. 우리 아들은 어떤 역경이 닥쳐도 꿋꿋이 이겨낼 거라고, 어머니 아들 원세는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백일, 그거 금방 지나갑니다. 벌써 보름 쨉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건강히 계십시오.”
원세의 눈에 물기가 촉촉이 어렸다.
“못난 놈! 사내대장부가 눈물이 나 질질 짜고...”
“누가 질질 짜요.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툴툴거린 원세는 샘 근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놈아! 정신이 사나운데 제대로 수련이 되겠느냐?”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겨우 열흘이 지났을 뿐입니다.”
“뭐라, 열흘, 이놈아! 어째서 열흘이냐 정확히 십삼일 째다. 알겠느냐? 멍청한 놈아!”
“정말 못 말린다니까, 나도 늙은이, 늙은이 할까 보다.”
“무엇이라! 이놈이 오냐오냐했더니,”
“뭐가 잘못됐어요. 놈, 놈 하니까 그렇지 요.”
“으... 내 성질대로라면 당장에 내 참는다. 참아...”
광마는 원세와 입씨름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화도 입씨름하는 즐거움에 금방 수그러들었다.
원세는 샘물을 응시했다.
만빙어가 놀리듯 물 위를 떠다녔다. 그렇게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잡지 못한 만빙어였다. 게다가 만빙어를 잡기 위해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마류 흡자결(魔流吸滋抉)을(魔流吸滋抉)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수련했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수련했지만, 성취는 물방울이 떨어져 일으킨 물결만큼도 일으키질 못했다. 도통 진전이 없자 은근히 짜증이 난 원세였다.
‘제길, 할아버지가 펼칠 땐 쉬워 보였는데, 자질이 부족해서 그런가, 뭐든 보기만 하면 배울 수 있다고 자신했었는데, 심법 요결의 진의를 깨닫는데도 십 년이, 무공이란 것이 이토록 심오하고 무한한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엄청나!’
원세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만했음을 인정했다.
할아버지는 마류 흡자결의 구결을 가르쳐준 뒤 직접 펼쳐 보였다. 한 동작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었다. 세상에 샘물을 유영하던 만빙어가 할아버지의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따라 거짓말처럼 날아와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눈을 의심케 한 너무도 신기한 일이었다.
원세는 마류 흡자결이 대단한 무공이지만, 구결과 동작 하나까지도 기억하는 한 대성하는 데는 시간문제라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날을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무공의 세계가 무한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만심을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번씩 부공 신법으로 떠올라 마류 흡자결을 펼쳐 만빙어를 잡아먹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하루 식사였다.
그런데 요즘은 두 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원세에게 먹였다. 원세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마류 흡자결을 펼쳐 입속으로 쏙 넣어줬다. 만빙어는 입에 들어오자마자 사르르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맛은 천상의 맛이라고 할까, 감미로운 맛이었다.
그때마다 원세는 할아버지가 펼치는 마류 흡자결을 지켜봤고, 한 마리의 만빙어로 허기를 면할 수가 있었다.
원세는 살아있는 물고기를 어떻게 먹나, 먹더라도 한 마리론 허기를 면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질만 날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마리를 먹었음에도 배고픔이 싹 가신 것도 부족해 원기가 불쑥불쑥 솟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향기롭고 맛있는 물고기가 있다는 말도, 만빙어라는 물고기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만빙어가 암동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할 뿐이었다.
원래 마류 흡자결(魔流吸滋抉)은(魔流吸滋抉) 섭물신공(攝物神功)의 일종으로서 내공의 화후(和煦)가 깊은 자만이 펼칠 수 있는 절정의 수법이었다. 이미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무공이기도 했다. 그런데 노인 광마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원세에게 이 같은 사실은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 대성하라고만 다그쳤다.
원세는 원양 지체의 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원세가 아무리 원양지체의 몸이라 해도 절정 수법인 마류 흡자결을 단시일 내에 대성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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