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여기는 귀곡부(鬼谷府)
다음 날 아침,
여랑은 침실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여랑은 아침 일찍 원세를 배웅하기 위해 성문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원세는 이미 동이 트자마자 길을 떠난 뒤였다.
여랑은 원세가 동이 트자마자 떠났다는 말을 듣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아뜩함을 느꼈다. 힘이 빠진 다리와 몸은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옆에 있던 유모가 부축했고, 여랑은 정신을 수습할 때까지 원세가 걸어갔을 길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어떻게 침실까지 돌아왔는지 여랑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이토록 애틋할 줄은 상상도 못 했었기에 몰려온 슬픔은 더욱 컸다. 여랑은 조사의가 천생배필이라고 말했을 때도 이토록 가슴이 뛰진 않았었다.
아침까지 거른 여랑은 할아범 말대로 천생배필이자 낭군이 될 원세의 이름과 얼굴을 가슴에 새겼다. 그렇게 원세의 이름과 얼굴을 새기고 나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슬픔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가씨! 아버님께서 오셨습니다.”
“유모, 잠깐만...”
“이런, 이런, 그렇게 마음이 착해서야...”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이 열렸다.
미소를 머금은 진충원이 방으로 들어섰다.
누가 봐도 잔충원은 인자한 아버지였다.
“아버지!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세요.”
여랑은 얼른 눈시울을 훔치곤 공손히 예를 드렸다.
“쯧쯧, 마음이 너무 착한 것도 병, 암튼 앉거라!”
“네 아버지,”
진충원은 여랑이 앉자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랑아! 이젠 너에게 가문의 얘기를 들려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이 아비의 말을 새겨들어라!”
“아버지, 가문이라니요?”
여랑은 진지한 아버지 모습에 의외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충원은 진즉부터 딸인 여랑에게 가문의 가족사를 들려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몸이 정상이 아니었으므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제는 여랑의 몸도 좋아졌고, 무공을 익혀도 된다는 조사의의 말을 들었다. 여랑이 비록 딸이지만 후계자로 인정한 이상 내력을 말해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음이었다.
“여랑아! 변방인 신강에 한 호족 마을이 있었다. 그러니까 70년 전이었다.”
진충원의 진지한 얘기는 70년 전서부터 시작되었다.
여랑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버지 얘기를 경청했다.
70년 전, 일단의 무림인들이 신강에 있는 한 호족 마을을 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때 무림인들이 내세운 명분은 호족의 무사들이 정파의 무림인들을 살해했다는 터무니없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은 족장은 물론이고 마을에 불까지 질렀으며 살아있는 것들은 그 무엇이든 죽여 인멸했다. 그렇게 한 호족 마을은 멸문했다.
그 당시엔 호족들이 상단을 꾸려 장사를 다닐 때였다. 그렇다 보니 상단 간에도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상단은 없었다. 그런 때에 일단의 무림인들이 한 상단의 물건을 탐낸 나머지 물건을 갈취하려고 상단을 기습했다. 결국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상단 무사들과 무림인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 싸움이 빌미가 되어 상단의 마을까지 습격을 당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족장의 아들과 그 수족들은 출타 중이었고, 외유를 나갔던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족장의 아들을 중심으로 복수를 다짐했고, 은밀하게 움직였던 사황련을 활성화하여 힘과 세를 키우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난 50년 전이었다.
정사 대전이라 명명된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었다. 바로 정도무림이라 자처하는 무림인들과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사황련과의 결전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황련은 련주였던 진부광의 죽음과 함께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련도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다시 복수할 것을 결심했다. 그 당시 련주였던 진부광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진충원,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여랑아! 이곳이 바로 련도들이 50년 동안 피땀으로 일군 제 이의 사황련이다. 그때 네 할아버님은 운명하시기 직전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곤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다. ‘중원을 기필코 평정하라!’라고, 여랑아! 기필코 네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릴 것이다. 그러니 너도 잊지 말거라!”
“아 아버지! 소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고개를 숙인 여랑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음이었다.
“너무 속상할 것은 없다. 암튼 여랑아! 넌 이 아비의 후계자니라! 그러니 그에 합당한 실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아버지, 불효 여식을 용서하세요. 그동안 철이 없어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론 효도하는 여식이 되겠습니다. 무공도 열심히 배우고요.”
여랑은 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동안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었을까, 쿵쿵거리는 가슴을 여러 차례 쓸어내렸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진가장 습격 사건에 대해 의혹을 가졌던 자신이 불효 막심한 딸이었다고 자책했다. 무엇보다도 원세에게 혹독하게 대할 때마다 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원망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아버지 마음을 이해했다.
“여랑아, 내일부터 무공에 관한 공부에 들어갈 것이다. 본격적인 수련은 새해 봄부터 실시할 것이니, 일단은 그동안 숙지한 공부를 토대로 장로들에게 무공이 어떤 것인지, 기본부터 배우도록 하라!”
“그런데 아버지! 제가 무공을 배울 수 있겠어요.”
“여부가 있느냐, 그동안 학문도 학문이지만 몸을 수련하는데 유용한 공부를 겸했느니라! 그러니 너는 훌륭한 여전사, 아니 여장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조 의원도 일세를 풍미할 여장부라고 자랑했느니라!”
“할아범은 못 하는 말이 없다니까,”
“어떠냐, 허약하기만 했던 네가 대장부들을 능가하는 여장부가 된다는 것이 말이다.”
“아버지! 저는 솔직히 평범한 여인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건 안될 말이다. 명심하거라! 내일부터다.”
“네, 아버지,”
아버지의 지엄한 말씀에 여랑은 공손히 대답했다.
여랑은 평범한 여인으로서 한 남자의 지어미가 되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한 번씩 미래에 대한 행복한 꿈도 꿔 봤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무공을 익히라니, 그렇다고 못 하겠다는 말도 못 하는 여랑이었다.
‘할아범과 의논을 해야겠어,’
여랑은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다. 이럴 땐 할아범과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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