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의 아들 2권 1
1장, 짧은 만남
휘이잉, 휘잉--
사라락, 사라락, 사락,
어둠이 짙게 깔린 량산으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들은 비비적거리며 옷을 벗더라도 순리에 따르자고 속삭였다. 순리를 거역하는 인간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비웃듯이--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숲속,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보였다. 불빛은 숲속에 있는 한 초막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 얘기 소리도 들렸다. 순찰 무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밤에 잠깐씩 눈을 붙이는 초소로 활용되었던 초막이었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우리 원세가 딴사람이 됐구나. 아주 늠름해졌다. 어딜 가든 공자 소리도 듣겠고, 처자들이 봤다면 반하겠는걸,”
“숙부! 놀리지 마십시오. 공자 소리를 듣다니요. 종놈이,”
“무슨 소리, 너는 면천이 됐다. 이젠 떳떳이 네 이름을 사용해도 된다. 알겠느냐?”
“정말입니까, 숙부! 이야, 이제야 떳떳이 살게 됐군요.”
원세는 순간 기뻤으나 번뜩이는 원한이란 글자가 뇌리를 스치는 바람에 혼잣소리처럼 차갑게 말했다.
사실 원세는 계곡물에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숙부와 간소하게 제를 지냈다. 그때 부모님에게 약속했다. 부모님 말씀대로 당당한 원세로 살아남겠다고, 그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는 아들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 약속이었다.
철인은 제수를 장만하러 갔다가 원세에게 입힐 옷을 사 왔다. 마의(麻衣)지만 무복처럼 몸에 잘 맞았고, 옷 색깔에 맞춰 황색 머리띠와 튼튼한 가죽신도 사 왔다.
한눈에 봐도 원세는 늠름한 청년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
그 누구도 16세 소년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숙부!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원세는 숙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
‘무슨 말을, 혹시 복면 괴한들에---’
철인은 괴한들에 관해 물어보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사실은 의혹이 가는 일들이 있기는 했으나 확인된 바는 없었다.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지 신경이 쓰였음이었다.
“무슨 말인지, 말해 보거라!”
“숙부! 다른 게 아니고, 부모님의 신세 내력을 알고 싶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나오면 진실을 말씀해 주시겠다고,”
“아, 그랬었구나. 그런데 원세야! 네 아버님은 자신의 신세 내력을 함부로 말한 적이 없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단다. 하지만 훗날을 생각했는지, 내게는 말을 했었지,”
철인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니까요.”
“네 말대로 우린 피를 나눈 형제와 같았다. 하지만 원세야! 나도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럼 덕보 아저씨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을까요?”
순간, 철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원세야, 내가 알기론, 덕보 그 친구는 아버지에 관하여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알아서도 안 되고, 그러니 부모님에 관한 얘기는 너만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 알겠느냐?”
“예 숙부!”
원세는 날카롭게 번뜩였다가 사라지는 숙부의 눈빛을 봤다. 그 순간 덕보 아저씨와 숙부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겼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숙부는 친구인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한 번씩 얼굴 근육이 씰룩거릴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땐 좋지 않았던 상황을 말할 때였다.
그러니까 숙부께서는 낭인 시절 노예검투사였던 아버지를 만났으며, 아버지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가 되었고, 서로 뿌듯해했었단다. 그리고 한 번씩 술잔을 나누며 신세타령도 했었다고 말하곤, 측은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원세를 쳐다봤다.
잠시 뜸을 들인 숙부는 아버지의 과거사를 말했다.
가슴 아픈 사연이라 숙부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러니까, 어머니 이름은 묘인,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못 훔치는 물건이 없었다는 대도(大盜) 묘신수의 여식이었다고 숙부는 말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인 대도 묘신수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 상황설명까지 해가며 말해줬다.
원세는 부모님의 기구한 운명에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어떻게 해서든 원한은 풀어드리고 싶은 원세였다.
하지만 숙부는 훗날을 기약해야 한다며 경거망동은 금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절대로 오늘의 얘기는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특히 제갈세가와 진가장의 인물들이 알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으셨다.
원세는 노예검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얘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어머니의 원수가 바로 제갈세가라는 말에 분노를 느꼈고, 왜? 부모님께서 그토록 말씀을 아끼셨는지 이제야 짐작이 되었다.
그러니까 25년 전이었다.
족쇄를 찬 한 젊은이가 상선을 타고 중원으로 끌려왔다. 젊은이는 노예시장에서 한 호족의 노예로 팔렸고, 노예검투사가 되었다. 그 후 생사를 건 결투를 할 때마다 젊은이는 죽지 않기 위해 상대 검투사를 죽여야만 했다. 젊은이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어떻게 하면 검투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심했다.
검투사 생활 3년째였다.
젊은이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제의가 들어왔다.
한날 무림 세가인 제갈세가에서 세를 키우기 위해 대대적으로 무사들을 모집했었다. 그때 무패의 노예검투사가 있다는 말이 가주의 귀에 들어갔고 욕심이 생긴 가주 제갈왕민이 검투장에 직접 나타났다. 그때가 바로 노예검투사였던 젊은이가 거구의 검투사와 결투를 벌이기 위해 준비할 때였다.
누가 봐도 젊은 검투사가 이길 확률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무(全無)였다. 도박사들은 거구의 검투사에게 거금을 걸었다. 하지만 늦게 도착한 제갈왕민은 의외로 젊은 검투사에게 큰돈을 걸었다.
그렇게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결투가 속개(續開)되었다.
도와 검이 불꽃을 튀긴 것이 오십 합은 넘었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대결이었다. 젊은 검투사는 여러 번 위기의 순간을 넘겼고, 옷이 갈가리 찢길 정도로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반면 거구의 검투사는 쥐방울만 한 상대를 요절내지 못하자 분기탱천해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지만 거구인 만큼 합이 더해갈수록 지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상태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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