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만리(有情萬里)

유정만리 1권 9화

썬라이즈 2023. 8. 10.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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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중천으로 떠오른 시각, 오대산은 온통 은빛으로 눈이 부셨다.

천지봉 일대는 물론이고 기암괴석들과 고송들, 잡목들까지 꽃가루를 뿌리듯 은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은빛의 설원, 검은 인영이 백지에 선하나 긋듯 산등성을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인영은 곰처럼 눈 덮인 산등선을 잘도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리저리 몸을 틀어가며 나무와 나무사이를 잘도 빠져나왔고 장애물이 있으면 타 넘기도 했다.

 

후후, 휴후,

“이젠 거의 다 왔다.”

검은 인영은 호피로 만든 커다란 포대를 업듯이 짊어졌고,

발에는 나뭇가지를 총총히 엮어서 만든 커다란 설피를 신었다.

사나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가야, 이 능선만 돌아가면 우리 집이다. 조금만 참아라!”

사나이는 설피를 왼발에 신고 오른발을 이용해 앞으로 쭉쭉 밀었다.

그러자 설피는 미끄러지듯 밀려 나갔다.

한 번씩 눈 속에 푹 빠지기도 했으나 사나이는 계속 움직였다.

 

“저기 연기가 나는 집이 우리 집이다. 네 엄마가 될 분이 저녁을 짓는 모양이다. 서둘러야겠다.”

사나이는 눈꽃이 만개한 적송 아래로 눈 무덤처럼 보이는 초옥을 바라보며 포대를 몇 차례 토닥였다.

초옥 굴뚝에선 몽실몽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를 본 사나이는 힘이 솟는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저녁노을은 화공(畵工)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설원에 그려 넣고 있었다.

우주 어느 공간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곳은 없을 것이었다.

만사만악(萬邪萬惡)도 이곳에선 한갓 선한 양으로 바뀔 것 같은 순수의 세계였다.

 

눈 덮인 초옥(草屋)은 주인을 기다리듯 싸리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것도 부족해 대문 기둥엔 멀리서도 보이게끔 등불이 내걸렸다.

그리고 대문 앞 10장까지 눈들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이것만 보더러도 초옥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배려심이 많고 부지런한 사람인지 짐작이 되었다.

 

사나이는 꿈을 꾸었고 마누라에게 꿈 얘길 했다.

꿈 얘길 들은 마누라는 신령님께서 특별한 계시를 내린 것이라며 기뻐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누라는 신령한 꿈은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산에 올라가야 한다며 떠나기 전날 밤엔 목욕물까지 끓여주었었다.

사나이로선 위험할 수 있는 눈보라 속으로 내쫓는 마누라가 밉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나이는 마누라 뜻에 순순히 따랐다.

그만큼 마누라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엔 눈보라가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하지만 사나이는 마누라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그렇게 집을 나선 사나이는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산에 올랐다.

그리고 꿈의 계시대로 천년설삼을 캐게 되었다.

 

초옥 앞에 당도한 사나이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얻고 싶었던 아들을 얻었으니 감개가 무량했음이었다.

사실 마누라 얼굴을 대하려니 꿈인가 생시인가 가슴까지 쿵쾅쿵쾅거렸다.

 

“마누라! 나 왔소! 업둥이를 데려왔소! 업둥이 말이요.”

사나이는 들뜬 기분에 큰소리로 마누라를 찾았다.

“서방님!”

여인이 방문을 벌컥 열고 뛰어나왔다.

얼마나 애를 태우며 기다렸던 서방인지 버선발이었다.

 

“마누라 업둥이--”

“서방님, 그런 농담은... 몸은 괜찮으세요.”

“마누라! 정말이라니까.”

“알았어요. 고생 많았죠.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요,”

여인은 무사히 돌아온 서방이 고맙고 기뻐서 서방의 말은 귓등으로 들렸다.

단지 쫓겨나듯 산에 올랐던 서방이 추위에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것만 걱정이었다.

 

“마누라, 일단 들어갑시다.”

“추운데 먼저 들어가세요, 곧 더운 밥상을 차릴게요.”

여인은 고생한 서방만 안쓰럽던지 부엌으로 달려갔다.

 

나무꾼 마누라쯤 되면 뚱뚱하고 칼칼한 목소리에 우악스러운 여인일 것이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어도 여인의 굴곡진 몸매는 양귀비를 능가하는 몸매였고 목소리 또한 맑고 깨끗했다.

특히 겸손과 미덕이 말속에 담겨있었다.

 

그런데 하늘의 시샘이 있었음인가, 여인은 천하에 둘도 없는 박색이었다.

박색인 것만 같으면 그것도 괜찮지 싶었다.

여인의 얼굴은 움푹움푹 파인 것이 ‘천포창(天疱瘡)’ 마마를 심하게 알았는지 완전 곰보얼굴이었다.

여인의 얼굴이 희미한 등불에 드러난 것이긴 했지만 못생기긴 정말 못생겼다.

그럼에도 사나이 눈엔 부인이 천하절색이었다.

 

사나이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포대를 풀어헤쳤다.

그러자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동안 심하게 요동을 쳤음에도 아기는 생글거리며 잠만 잘 자고 있었다.

 

잠시 후,

밥상을 차려온 여인은 아기를 보고 너무 기뻐서 밥상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사나이 앞에 밥상을 내려놓곤 아기를 안았다.

꿈인지 생신지 잠깐 정신이 멍하긴 했지만 아기를 안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다.

사나이는 마누라가 차려온 밥을 먹으면서도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을 흘끔거린다.

아기를 얼레는 여인의 입은 아기를 본 순간부터 찢어지도록 벙글 벙글이다.

 

“마누라! 이쪽으로 좀 돌아앉아 보시오.”

상을 물리며 사나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마누라를 불렀다.

“예, 서방님! 에구 요놈 봐라, 맘마를 먹어야지...”

여인은 서방이 부르니 대답은 시원하게 잘했다.

그렇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아기만 보듬었다.

여인에겐 서방은 뒷전이고 아기가 우선인 모양이었다.

 

여인은 언제 준비를 했는지 멀건 죽사발을 들고 아기를 어르며 죽을 먹였다.

아기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고, 그 사이 사나이도 은근슬쩍 여인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아기에게 맘마를 먹이는 여인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그런 사나이 얼굴은 정말이지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이다.

 

‘허, 이렇게 좋아할 수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아기 서너 명은 데려오는 건데, 그래도 이놈만은 못할 게야...’

사나이는 마누라가 신통방통 예뻐 죽겠고, 아기 또한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죽 그릇을 다 비운 아기는 그때서야 스르르 눈을 감는다.

여인은 아기를 아랫목에 눕히고 서방 앞에 다소곳이 앉아 진진한 표정으로 서방을 쳐다보았다.

 

“서방님! 고마워요. 이 눈밭에 고생이 심하셨죠. 신령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아기를 맡기셨어요. 그러니 아기를 잘 키워야 해요. 이젠 전후사정을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언제 말할 틈이나 주었소. 마누라는 아기가 나보다 더 좋은 갑디다. 안 그렇소. 마누라!”

“어찌 제가 서방님을, 당치도 않은 말씀이세요. 아무튼 서방님, 그간 겪으신 일이나 말씀하시어요.”

여인은 눈을 찡긋거리며 사나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이렇듯 나긋나긋하게 다가앉는 마누라가 비록 곰보에 박색이긴 했지만 사나이 눈엔 선녀처럼 예쁘기만 했다.

“......”

“험험, 마누라,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그러니까 여차여차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소. 허니 마누라, 목합이나 열어보고 거기 서책에 아기의 신세 내력이 쓰여 있는지 그것이나 알아봐 주시오,”

 

사나이가 자초지종을 얘기할 때에 여인은 몇 번이나 손을 쥐락펴락했는지 모른다.

죽은 여인의 참상을 얘기할 때는 등짝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열병에 걸린 아기를 발가벗겨 눈 속에 파묻었었다고 했을 때는 얼굴색이 파리하게 질리기도 했었다.

 

여인은 얘기를 다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잠자는 아기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감사의 표현으로 기쁨의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서방님, 정말 고마워요. 서방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귀한 아들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내 덕은 무슨, 다 마누라 정성 때문이지, 아무튼 목합이나 열어봅시다. 내 열어보니, 서책과 목걸인지 그것뿐이었소!”

 

여인은 조심스럽게 목합 뚜껑을 열었다.

먼저 목걸이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서방님! 이것은 백동으로 만들긴 했으나 어떤 신표 같습니다. 글자가 쓰여 있긴 한데, 알아볼 수가 없어요, 서방님이 깨끗하게 닦아주세요. 나는 이 서책을 훑어볼게요.”

“알았소! 이리 주시오.”

 

여인은 신표를 건네곤 서책을 한 장씩 넘겨가며 찬찬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 여인의 얼굴은 놀람에 앞서 매우 진지했다.

그렇게 마지막책장을 넘겼을 때였다.

봉서 하나가 ‘툭’ 떨어졌다.

여인은 서책을 내려놓고 봉서(封書)를 집어 들었다.

봉서를 든 여인의 손이 잔잔히 떨렸다.

이를 본 사나이도 긴장이 되었는지 다가앉으며 침을 꼴까닥 삼켰다.

 

여인은 조심조심 봉서를 뜯고는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아들아!

네가 밝은 세상에 나온 지 백일,

가문이 멸문당할 급박한 상황에서 이 글을 쓴다.

아비는 부득이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침통(沈痛)한 마음으로 너를 피신시켜야만 했다.

멸문의 원흉들은 정도맹과 오대세가로 짐작된다.

아들아!

훗날,

그때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듣게 될 것이다.

멸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원한이 사무칠 것이다.

하지만 아들아! 원한을 복수로 갚지 말라!

정의를 저버린 자들에겐 그 대가만 치르게 하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아들아!

무너진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라!

그리고 아들아!

너를 키워주신 분들을 부모이상 공경하며 받들어 모셔라!

이것이 아비가 아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다.

 

네 이름은 만무룡(万武龍)!

만무가(万武家)의 유일한 혈손이다.

만무가(万武家)는 쑹산(崇山) 운무곡(雲霧谷)에 있다.

 

아버지 만천(万天)이 쓰다.

 

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서찰을 읽었고 사나이는 묵묵히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은 울분으로 일그러졌다.

 

“서방님! 아기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겠어요. 그리고 서방님, 아기와 서방님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나 봐요. 서방님 성함이 만복철(万福哲)이니, 아기의 이름도 그냥 만무룡(万武龍)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그리고 이 목합은 날이 풀리는 대로 암동(巖洞)에 갖다가 잘 보관해 두세요. 참, 아기엄마의 묘도 세워야겠어요. 그땐 저도 따라가서 서책을 몇 권 가져와야겠군요.”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할 말은 다했다.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며칠 못 봐서 그런가, 우리 마누라 얼굴이 선녀처럼 예쁘오.”

“아이 서방님도 오늘은...”

“히히- 그래도 안 되지--”

“알았어요. 이불은 깔아야지요.”

 

호롱불은 꺼지고...

밤은 천지봉 일대를 어둠에 가뒀다.

업둥이 무룡도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 3장, 소년 만 무룡으로 이어집니다.

^(^,

태풍이 북상 중입니다.

모두 피해 없도록 철저히 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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