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산 속이라 어둠은 빠르게 계곡으로 밀려들었다.
사나이가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온 시간은 정오가 되기 전이었다.
그때부터 계산하면 서너 시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시간 탓일까, 사나이의 몸은 이미 꽁꽁 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기의 주위는 무슨 이유에선지 눈이 녹아내려 푹 꺼져 있었고,
아기는 꺼진 눈속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
휘이잉, 휘잉,
눈보라를 실은 회오리바람이 계곡을 쓸고 지나갔다.
계곡의 눈들이 마치 바람에 매화꽃 날리듯 휘날렸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사나이의 수염에 여러 개의 고드름이 열렸다.
하지만 사나이는 몇 날 밤을 지세더라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얼어버린 산송장이 된다고 해도 아기가 열병에서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었다.
우, 우, 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선 총총히 박힌 별들이 영롱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별빛을 시샘한 반달이 은빛을 설원으로 뿌려댔다.
그 빛으로 사나이와 아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까지도 사나이는 선 자리에서 한 발작도 움직이질 않았다.
수염에 달린 고드름이 제법 크게 자랐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의지를 시험하듯 운명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산신령님! 산신령님께서 이놈을 이곳으로 보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놈에게 시키신 일인데 목숨이 무에 아깝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아기를 죽이실 요량이시라면 부디 이놈을 데려가시고 아기만은 살려주십시오. 어리석은 이놈의 소원이옵니다.’
사나이는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빌고 또 빌었다.
오로지 아기가 열병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라면서...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은빛을 뿌려대던 반달마저 기울어갈 무렵이었다.
사나이 마음을 아는 양 섧게 울어대던 늑대들도 잠잠해졌다.
천지봉 일대도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고 한 번씩 몰아치던 바람도 자정이 넘어가자 잦아들었다.
“으앙, 으앙, 으앙,”
느닷없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위를 깨웠다.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는 천지봉를 깨우며 울려 퍼졌다.
너무도 우렁찬 울음소리에 사나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아가 아 아 가...”
사나이는 아기를 목청껏 불렀다.
그러나 쉰 바람소리만 나올 뿐 목소리는 새어나오지도 않았다.
사나이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놀란 나머지 눈만 번쩍 떴을 뿐이었다.
사나이의 얼어버린 몸은 산송장이나 진배없었다.
그래도 사나이는 침착하게 어찌할지 궁리를 해댔다.
‘그래, 내 몸이 언 산송장이 된 게야! 이럴 땐 움직이는 곳부터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무리를 하면 뼈가 부러지든가 근육이 상한다.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그래 아주 천천히...’
사나이는 어리석고 무식하다는 말은 해댔어도 경험과 얻어들은 것들은 많았던 사나이였다.
정말이지 천만다행이었다.
허리 아랫부분은 온기가 남아있었고 발가락은 조금씩 움직일 수가 있었다.
눈 속에 묻혀있다 보니 하반신은 온기가 유지되었던 모양이었다.
사나이는 아주 천천히 발가락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앙, 으앙, 으앙--”
우--우--
아기의 울음소리가 천지봉 일대를 들썩였고 나무에 얹혔던 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부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사나이조차 몸을 떨어댔다.
“으앙, 으앙, 으앙--”
아기는 천지봉이 떠나가라 계속 울어댔다.
대략 일각은 지났을 것이다.
사나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팔운동을 해댔다.
그리곤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르르 고드름이 떨어져 내렸다.
사나이 딴엔 무지하게 기쁜 표정이었으나 남이 보았다면 흉한 우거지상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한차례 허리운동을 한 사나이가 허리를 숙여 아기를 내려다봤다.
순간, 사나이의 눈에 경이의 빛이 일렁거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아기는 커다란 얼음항아리 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아기의 몸에서 뿜어진 열기로 인해 아기의 반경 내에 있던 눈들이 녹았을 것이다.
그렇게 녹아내리던 눈들이 영하 10도 이상의 추위에 그대로 얼었고, 마치 얼음항아리처럼 만들어졌다.
이것만 보더라도 아기의 몸에서 얼마나 뜨거운 열이 발생했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얼음이 얼었다는 것은 아기의 몸에서 뿜어지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는 증거였다.
아기는 손과 발을 버둥거리며 연신 무엇인가 잡으려는 시늉을 해댔다.
아기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으 아! 아아아!
으앙, 으앙--
사나이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쭉 뻗으며 고함을 치고 말았다.
그러자 아기도 목청껏 울어댔다.
이렇듯 천지봉 일대는 두 사나이의 울음과 고함소리에 또다시 놀랐다.
사나이는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리곤 아기를 하늘높이 치켜들었다.
아기는 울음을 그쳤고 여지없이 사나이의 수염을 잡아갔다.
사나이의 얼굴엔 환희의 기쁨이 어렸으나 서글서글한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렇게 글썽거리던 눈물은 이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가야! 이곳엔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다. 날이 밝는 대로 집으로 가자, 너도 그러는 것이 좋겠지...?”
사나이는 한참동안 아기를 안고 얼러댔다.
암동으로 들어온 사나이는 아기를 침상에 눕히자마자 바닥에 팽개친 나뭇가지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임시방편이지만 눈신발인 설피(雪皮)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게 밤은 새벽을 향해 치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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