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업둥이
휘리링, 휘리링,
6일 전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설(暴雪)은 오대산 중지에 위치한 천지봉(天池奉) 일대를 고립무원의 세계로 만들고 있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소리는 마치 죽음을 몰고 다니는 죽음의 호곡성(號哭聲)처럼 들렸다.
“으, 빨리 동굴을 찾아야 한다. 이러다간 길을 잃겠다.”
무섭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뚫고 검은 점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지봉(天池奉)에서도 제일 험하다는 사골계곡(死骨溪谷)을 따라 이어진 능선이었다.
“내 생전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은 처음 본다. 제기지랄, 후후- 그래 이 능선만 돌아가면 된다.”
사나이는 푹푹 빠지는 눈밭을 힘겹게 걸으면서도 무엇을 찾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폭설이 내린 지도 벌써 7일째,
천지봉 일대는 살아 움직이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오로지 사나이뿐이었다.
“어어-어, 이런, 으아...”
발을 헛디뎠는지 사나이가 별안간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완전히 눈덩어리가 되어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진 거리를 대충 계산해도 한 20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진 사나이는 하나의 커다란 눈덩이로 화했다.
능선보다 눈이 많이 쌓인 계곡은 적어도 사람 한길 이상은 쌓였을 것이다.
그런 계곡으로 칼바람이 지나가며 눈발을 사정없이 날렸다.
그 여파로 떨어져 내린 눈덩어리가 자취를 감추듯 눈 속에 파묻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취를 감췄던 눈밭 속에서 사나이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렇게 머리를 내민 사나이가 허우적거리듯 팔을 움직였다.
몇 차례 허우적거려 몸을 빼낸 사나이는 계곡 좌우를 둘러보곤 히죽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동굴 밑으로 떨어졌잖아!”
일시 안도의 빛으로 절벽을 바라본 사나이가 푹푹 빠지는 눈밭을 기기 시작했다.
사나이가 양손으로 눈을 헤치며 기어가는 모습은 곰이 눈밭에서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사나이가 기어가는 앞쪽엔 가파른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절벽까지의 거리는 대략 10장쯤 되었다.
사나이는 눈밭 위를 사력을 다해 기고 또 기었다.
사나이가 힘을 쓸 때마다 사나이의 큰 몸집이 눈밭에 푹 빠졌다.
그렇게 빠졌다가 솟아나길 반복하면서도 사나이는 계속 앞으로만 전진했다.
얼마나 용을 쓰며 기어가는지 사나이가 내뿜는 콧김이 화가 난 황소가 내뿜는 콧김 같았다.
불과 10장 거리였다.
하지만 사나이는 일각이란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절벽 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만큼 눈밭을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음이었다.
어떤 위인일까 살펴보니,
사나이는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제법 묵직해 보이는 가죽포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후휴- 이곳이 분명한데...”
잠시 절벽 주위를 살펴본 사나이는 허리에 꿰찬 도끼를 쑥 빼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절벽 밑에 쌓인 눈을 꾹꾹 찔러댔다.
그렇게 눈 속을 조사하던 사나이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쌓인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사나이는 장비를 연상시키게 하는 50대 사나이였다.
텁수룩한 수염과 부리부리한 눈, 곰처럼 튼튼해 보이는 몸집은 영락없는 장비였다.
하지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과 따뜻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우직한 인물일 것이었다.
철퍼덕, 철썩, 쿵!
거뭇거뭇 바닥이 드러나자 사나이가 허리를 폈다.
그 순간 공교롭게도 절벽 위에 쌓였던 눈이 눈사태가 나듯 떨어져 사나이를 덮쳤다.
“이런 우라질, 기껏 눈을 치웠더니...”
사나이의 입에서 짜증 난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잠시 절벽 위를 노려봤던 사나이가 떨어져 내린 눈을 치우곤, 눈으로 막힌 절벽 밑을 도끼로 푹푹 찔러댔다.
그러자 벽처럼 막혔던 눈덩이가 쏟아져 내렸고 구부리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나타났다.
“찾기는 제대로 찾았군.”
사나이는 동굴 입구와 주위를 대충 정리하곤 곰이 물기를 털어 내듯 몸을 좌우로 흔들어 댔다.
그러자 옷에 남아있던 눈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킁킁, 킁킁,
“아니, 이 냄샌, 피, 피 냄새잖아...?”
동굴로 들어서려던 사나이의 얼굴이 별안간 경직되었다.
눈빛도 날카롭게 번뜩였다.
“사람의 피 냄새가, 무슨 일이지...?”
들짐승들이 냄새를 맡듯 킁킁거렸던 사나이가 허리를 구부린 채 동굴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동굴 속은 어두컴컴했다.
사나이는 짊어지고 있던 가죽포대를 벗어서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곤 겁도 없는지 주위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포대를 풀어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탁- 탁- 탁-
사나이가 부싯돌을 몇 번 그어대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사나이는 민첩하게 가지고 있던 작은 솜뭉치에 불을 붙였다.
그리곤 포대 속에서 솜방망이를 꺼내 옮겨 붙였다.
아마도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솜방망이를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다녔던 것 같았다.
동굴 안이 불빛에 훤하게 드러났다.
사나이는 예리한 눈빛으로 동굴 안을 세밀히 살폈다.
대략 폭은 1장 길이는 3장쯤 되는 동굴이었고,
안쪽 바닥은 들짐승들이 살았던 모양으로 낙엽과 마른풀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작은 횃불을 들고 동굴 안쪽으로 다가간 사나이는 냄새가 나는 풀과 낙엽 더미를 살살 헤쳤다.
그러자 너무도 끔찍한 몰골의 시체가 드러났다.
헉!
“아니! 이럴 수가...?”
사나이가 헛바람을 일으키며 주춤거렸다.
그래도 대범하게 끔찍한 몰골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주춤했던 사나이가 횃불을 가까이해 웅크리듯 모로 쓰러져있는 여인을 살폈다.
드러난 여인의 몰골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었다.
옷은 갈가리 찢기다 못해 핏물이든 넝마였다.
그런데도 여인은 웅크린 채 무언가를 감싸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분명, 여인은 무림인, 어쩌다 이토록 험악하게 당했지, 아니, 뭔가 안고 있는 것 같은데...?”
사나이는 조심조심 여인을 바로 눕혔다.
“아! 아기가!”
여인을 바로 눕힌 순간 사나이가 기겁했다.
여인이 안고 있는 것은 아기를 감싼 강보였다.
강보엔 백일쯤 되었을 아기가 얼굴만 내민 채 세상과는 무관하다는 듯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빙긋이 웃는 듯 잠든 아기의 모습은 선도 악도 없는 평화스러운 모습이었다.
사나이는 침착하게 여인의 품에서 아기를 안아 들려고 했다.
그러나 죽은 여인이 얼마나 아기를 귀히 여겼던지 여인의 팔이 쉽게 풀리지가 않았다.
사나이는 힘을 주어 아기를 빼앗듯이 안아 들었다.
으앙, 으앙, 으앙,
그 순간 아기가 놀랐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동굴이 웅웅 거렸다.
“허허, 그놈 울음소리 한번 크다.”
으앙, 으앙, 으앙,
아기가 기겁하듯 울어대도 사나이는 크게 놀라거나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사나이는 아기가 울어도 관여치 않고 낙엽과 부드러운 풀들을 간추려 한쪽에 깔았다.
그리곤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그 위에 깔고는 아기를 눕혔다.
그러자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던 아기도 지쳤는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며칠은 이곳에 있어야겠지,”
사나이는 포대를 들고 한쪽으로 가더니 내용물을 쏟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꿩 한 마리와 물 담는 조롱박,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과 부싯돌 등이었다.
그리고 주둥이를 꽉 조여 맨 작은 자루가 하나 있었다.
‘시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사나이는 잠시 아기와 죽은 여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곤 성큼성큼 여인 곁으로 다가가 덮여있던 풀들을 치웠다.
“이럴 수가...? 어찌 인간으로서 이토록 난자를, 그것도 여인을,
강호무림이 악랄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줄은 진정 몰랐다.”
차마 눈을 뜨고는 바라볼 수 없는 광경에 사나이의 부릅뜬 눈가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여인의 갈라진 아랫배에서 흘러나온 창자는 뻣뻣하게 얼어있었다.
사나이는 핏발 선 눈으로 여인을 한동안 세밀히 살펴봤다.
그리곤 여인을 옮기기 위해 안아 들었다.
툭!
여인을 안아 든 순간, 여인의 몸에서 작은 물체가 떨어졌다.
핏물이 얼룩진 작은 목합(木盒)이었다.
쿵쿵, 쿵쿵,
사나이는 목합을 아기 옆에다 옮겨놓고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동굴 안쪽으로 걸어가 바닥을 몇 번 내리쳤다.
그러나 바닥은 암반인지 소리만 요란했다.
“제기랄, 당분간 묻어두려고 했더니, 풀로 덮어둘 수밖에”
“에잇,”
짜증이 났는지 사나이가 안쪽 암벽을 냅다 후려쳤다.
쿠~웅~
“안에 공간이 있나...?”
사나이가 공명소리에 고갤 갸웃거리며 벽을 향해 돌아섰다.
“수상한데, 혹시...?”
고개를 갸웃거린 사나이가 암벽을 세세히 살피더니 도끼를 꽉 틀어쥐었다.
동굴에 여러 번 들어와 봤지만 단 한 번도 이상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번 쳐보면 알겠지"
사나이가 벽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쿵- 쿠웅--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인지 쿵 소리와 함께 구멍이 뻥 뚫렸다.
사람머리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뚫린 것이다.
“뭐야! 암동이...”
“으앙, 으앙, 으앙---”
사나이는 눈을 크게 떴고 아기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놈아! 실컷 울어라! 네 어민 지는 죽은 지 오래됐다. 어쨌거나 네놈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큰 인물이 될 것 같다. 이거, 마누라가 제일 기뻐하겠는 걸, 허허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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