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이 기겁하여 구덩이로 몸을 날렸다.
구덩이엔 끔찍한 몰골의 태궁이 자영을 직시한 채 할 말이 있는 양 입을 씰룩였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할아버지!”
“자영아! 미안하다, 너에게는 할 말이 없다. 으--”
태궁의 몰골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으며 가슴엔 살점이 뭉텅 뜯겨 나간 것처럼 움푹 파여 있었고 검게 퇴색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한 악취까지 풍겼다. 태궁은 숨이 경각에 달렸는지 연방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할아버지! 죽으면 안 되어요, 제가 잘못... 할아버지! 복수는 제가 하겠어요, 그러니 제 걱정은 마세요, 할아버지--”
자영의 눈에선 한과 독기가 뿜어졌다.
“자영아, 소연이를... 무룡이를 도와 주거라...”
태궁은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자영의 눈에선 두 줄기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할아버지! 제 손으로 꼭 복수를..’
자영은 눈물을 훔치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곤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자영의 눈엔 슬픔이 아닌 독기만 일렁였다.
마교의 이 인자였던 태궁은 이렇게 숨을 거뒀다.
자신을 악의 굴레 속에 가뒀던 마교!
그 마교를 위해 끔찍한 살겁을 수없이 일으켰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던 태궁!
그 업보로 사랑하던 여인과 자식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하는 손녀까지 마교의 제물로 바치게 된 태궁!
그의 불운했던 마지막 생(生)도 마교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사부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사부님!”
“너무 호들갑 떨지 말거라! 나는 괜찮다.”
“......”
‘으- 태궁! 대단했다. 그런데 태궁! 날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 순간에 검을 거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클클, 네 뜻을 알겠다. 손녀를 보살펴 달란 뜻이렸다.’
귀마는 천태일에게 한 소리 해대곤 중얼거렸다.
귀마의 얼굴엔 깊고 긴 검흔이 나있었다.
우측 눈에서부터 턱까지 그어진 검흔은 쩍 벌어진 채 피가 엉겨 붙고 있었다.
실로 귀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급히 지혈한 덕에 피가 흐르지 않아 그나마 덜 끔찍했다.
사실 태궁은 귀마의 목을 벨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두 사람은 양패구상(佯敗毆傷)하여 둘 다 죽었을 것이었다.
그 위기의 순간 태궁은 검을 옆으로 틀었다.
순간적이긴 했으나 검이 간발의 차이로 귀마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귀마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태궁! 내 목숨은 부지했으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허나 네 뜻을 존중해 줄 것이다. 편히 가라! 태궁!’
귀마는 품에서 가루약을 꺼내 얼굴에다 뿌린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순간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초막 안을 샅샅이 뒤져라! 헌데, 계집이 더 있다고 했지 않느냐? 그 계집을 찾아라! 만약 그 계집이 도망을 쳤다면 분명, 그 계집이 비록을 갖고 도망을 쳤을 것이다.”
“복명! 복명!”
“멀리는 못 갔을 것이다. 쫓아라!”
20여 명의 사나이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남은 자들은 초막과 주위를 이 잡듯 뒤지고 돌아다녔다.
“태일아! 저 여식이 태궁의 손녀냐?”
“예, 사부님!”
“데려 오너라!”
“예, 사부님!”
“......”
천태일은 귀마 앞에 아주 공손했다.
천태일은 어려서부터 귀마에게 무공은 물론이요, 학문까지 배웠다.
원래 귀마는 제가량을 뺨친다는 소리를 듣던 인물로서 천태일의 사부로는 과분한 인물이었다.
현재 귀마는 마교의 원로로 추대되어 막강한 권세를 떨치고 있었다.
“네 이름이 자영이냐?”
귀마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영은 귀마를 한차례 노려보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귀마는 흉측한 얼굴로 자영을 대하기가 뭐 했던지 머리를 묶었던 천으로 오른쪽 눈과 얼굴을 싸매곤 재차 입을 열었다.
“자영아! 할아버지와 나는 친한 친구 사이었느니라! 지금 교주로 계신 분도 한때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 모든 것이 너의 할아버지가 교를 배반하고 비록을 훔쳐 달아났기에 발생한 불상사니라! 그간 비록이 없어진 바람에 교에는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리고 너의 할머니도 촉망받던 교도였느니라! 그러니 자영이 너는 오늘의 일까지 모두 잊어라! 오늘부터 내가 너를 거둘 것이다. 나를 사부로 모셔라! 알겠느냐?”
“뭐라고요! 할아버지를 내 면전에서 죽여 놓고, 이젠 나보고 제자가 되라고요. 으, 나는 싫습니다.”
자영은 잡아먹을 듯 귀마를 노려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다 너를 위해서다.”
“좋아요. 내가 무공을 배워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선다면 어쩌시겠어요, 그때도 제자가 되라고 하시겠어요,”
“허허! 맹랑하구나! 암튼 마음에 들었다. 무공을 익히려면 그만한 한과 독기가 있어야지, 그래야 제대로 무공을 익히게 되느니,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실력을 키워라! 그때는 내, 네 손에 죽는다 해도 원이 없을 것이다.”
“흥! 그래요, 어디 두고 봅시다, 사부!”
자영은 독기 오른 독사처럼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리곤 귀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샅샅이 뒤졌지만 찾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찌할까요.”
초막을 뒤졌던 자가 보고했다.
“무엇이라! 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자영이 네가 알고 있겠지, 안다면 말해 다오. 마공비록은 네가 익혀야 할 무공이기도 하다. 알겠느냐?”
“모릅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벌써 배웠겠지요.”
“좋다. 믿겠다. 태일아!”
“예, 사부님! 말씀을 하시지요,”
“초막에 불을 질러라! 비록은 도망간 계집이 갖고 간 것이 틀림없다. 군막으로 돌아간다.”
“잠깐, 할아버지는 저대로 두고 가실 건가요,”
“자영아! 마교에서는 밖에서 죽은 자의 시신은 거두지 않는다. 그것이 마교의 법이다. 그대로 두고 떠난다. 여봐라! 꼭 계집을 잡아야 할 것이다.”
사나이들이 초막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사나이들은 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만화곡을 떠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의해 싸늘해진 태궁의 흉측한 시신(屍身)만 언뜻언뜻 보였다.
마교 인물들이 만화곡을 떠나고, 대략 한식경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무룡이 만화곡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서야 무룡은 곡 안에서 연기가 솟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룡은 불길한 생각이 들자, 급히 몸을 날렸다.
무룡의 몸은 한 마리 맹호가 질주하는 것 같았다.
이미 익힌 경공술이 있었기에 그의 몸은 날렵하고 빨랐다.
무룡은 곡 내로 들어서면서 아연실색했다.
‘아니 이럴 수가...?’
“할아버지! 소연아! 자영아! 할아버지!”
무룡은 곡 내로 들어서면서부터 태궁과 소연, 자영을 큰소리로 불러댔다.
이미 불길은 삭으러 들기 시작했고, 무룡은 초막 주위를 맴돌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무룡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머리를 한차례 흔들어대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장내의 상황으로 보아 일대 격전이 있었음을 무룡은 알아차렸다.
주위 물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있었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격돌이었으면 구덩이까지 파였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
“아니 할아버지!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할아버지!”
무룡은 움푹 파인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다가 기겁했다.
끔찍한 태궁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무룡은 볼 것도 없이 몸을 날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태궁의 몸을 흔들어 댔다.
그러나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할아버지! 소연이와 자영이는 어디로 갔어요.”
무룡은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시 태궁의 끔찍한 몰골을 살펴본 무룡이 날래게 구덩이에서 나왔다.
그리곤 천천히 초막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소연과 자영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소연과 자영은 무사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디로 갔을까? 혹시 우리 집에... 도대체 이런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누굴까? 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끔찍한 만행을... 진정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태궁 할아버지를 저 지경으로 만든 자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자냐?”
무룡은 구덩이로 다시 들어가며 치를 떨었다.
무엇보다도 소연과 자영이가 무사히 집에 가 있기를 빌었다.
“태궁 할아버지! 빨리 집에 가봐야겠습니다. 소연이와 자영이가 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할아버지를 안치를 해 드리겠습니다. 혹여 짐승들의 먹이가 될까 염려가 돼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할아버지! 빠른 시일 내에 양지바른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무룡은 소연과 자영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선,
그녀들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둘 다 집으로 가는 중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무룡은 손으로 흙을 파선 태궁의 시신을 덮기 시작했다.
무룡의 손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시신의 형태대로 흙을 덮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구덩이 속에 작은 무덤이 만들어졌다.
“빨리 가봐야 해! 집에 소연이와 자영이가 안 왔다면? 어느 놈들의 소행인지 꼭 밝혀낼 것이다. 내 손으로 태궁 할아버지의 한을 씻어드릴 것이다. 두고 봐라!”
“......”
무룡은 급한 마음에 익혔던 경공술들을 다 펼치며 달렸다.
맹호가 산을 달리듯 무룡은 어둠을 뚫고 그렇게 달렸다.
우- 우- 우---
멀지 않은 곳에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9월, 2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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