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태궁의 죽음
만화곡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낮게 깔렸던 안개가 햇살에 흩어지며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탐스런 꽃송이마다 영롱한 진주들이 방울방울 열렸다.
햇살이 진주들을 보듬자 방울방울 진주들이 부끄러운 듯 꽃송이 속으로 숨어든다.
세상에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이슬을 머금고 활짝 웃던 국화꽃들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치떴다.
국화꽃들은 사뿐사뿐 걸어오는 여인을 넋을 놓고 쳐다본다.
여인은 옅은 보랏빛 장의(長衣)를 입었으며 손에는 작은 대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백옥처럼 깨끗한 이목구비가 가히 선녀의 하강을 보는 듯했다.
산들거리는 미풍에 찰랑찰랑 나부끼는 긴 머리가 더없이 마음을 산란케 했다.
“할아버지, 뭐하세요.”
“소연이 왔구나, 후우, 공기 한번 시원하다.”
잡초를 뽑던 노인이 허리를 펴며 심호흡을 해댔다.
소연은 새벽에 국화잎으로 달인 물로 머리를 감았다.
그래서 그런지 소연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국향이 살랑살랑 퍼졌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국화꽃,
그 꽃잎을 따다가 그늘에 말려 차를 끓여 먹으면 그 맛이 환상적으로 좋다.
또한 술을 담근다면 신선주(神仙酒) 뺨칠 정도로 국화주의 맛이 좋고 간장(肝腸)에도 좋다고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국화잎이나 뿌리를 달여 먹어도 장에 좋다고 알려졌으며,
특히 여인들이 창포(菖蒲)로 머리를 감듯 달인 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윤기가 나고 그윽한 국화향기가 오래간다는 얘기도 있다.
“할아버지! 꽃잎 좀 따고... 같이 들어가요.”
“알았다. 어서 따거라!”
“그런데 할아버지, 무룡이는 언제 올 것 같아요.”
“예끼 이 녀석! 무룡이 소식을 듣고자 왔구나!”
“할아버진, 꽃잎을 마저 따려고 나온 거 에요.”
“내 눈은 못 속인다. 그런데 소연아, 아니다. 나중에...”
태궁은 말끝을 흐리곤 가슴까지 올라온 국화들 속으로 몸을 낮췄다.
소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꽃잎을 따기 시작했다.
초막 앞 평상,
태궁과 소연, 자영이 하늘빛 국화차가 담긴 청자찻잔을 앞에 놓고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소연아! 자영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할아버지, 너무 심각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소연은 태궁의 진지한 태도에 잔뜩 긴장했으나,
자영은 시무룩하게 태궁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잘 듣거라! 어쩌면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일 내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마음에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겠느냐?”
“네에, 여기를 떠나다니요.”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소연과 자영은 놀란 얼굴로 태궁을 직시했다.
“소연아! 자영아! 얼마 전서부터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다면 불순한 자들이 이곳을 들이칠 것이다. 이 할아비는 그때를 피하고 싶은 것이란다.”
“할아버지!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자영이 한 무릎 다가앉으며 태궁을 다그쳤다.
“......”
‘분명 다시 찾겠다고 놈이 말했어, 그래 정식으로 인사를 오겠다고, 그 일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아니야, 죽일 놈! 다시 만나면 내 손으로 꼭 죽이고 말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어쨌든 할아버지 말씀은 틀린 적이 없었잖아!’
자영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자영아! 너에게 못된 일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이 할아비는 직감하고 있었다. 너희들만은 곱게 자라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거늘... 이것도 업보인가, 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제 그 끝을 볼 때가 된 것인가, 일찍 죽었어야 했다. 일찍...’
태궁은 소연과 자영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소연아! 자영아! 할아비 말을 명심해 듣거라! 어쩌면 이 할아비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슬퍼하진 말거라! 현재 중원강호는 폭풍전야와 같다. 아마도 이곳 천지봉에서부터 피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소연아! 자영아! 너희들도 알고 있듯이 이 할아비는 그들을 피해 이곳에 숨어 살았던 것이다. 헌데 그들이 이곳을 찾아냈구나! 머지않아 그들이 이곳으로 날 찾아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이곳을 떠나야 한다. 혹여 각자 떠나게 되더라도 절대 이 할아비와 연관이 있었단 말은 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무슨 말씀이세요. 함께 떠나면 되지요.”
소연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태궁을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무공이 높으신 데, 무엇을 두려워하세요.”
자영의 짜증 난 목소리엔 살의가 깔려있었다.
“그들은 마도(魔道)들이다. 이 할아비도 어쩌지 못한다.”
“그럼...”
“그런데 할아버지! 저희에게는 왜, 실전무공은 가르쳐주시지 않으셨어요. 무공을 가르쳐주셨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잖아요. 기껏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 경공술 따위나 가르치고 크게 써먹지도 못할 장풍을 익혀라 하시더니, 이게 뭐 에요. 예의범절이 무에 필요하다고, 제 몸 하나 지키지도 못하는데...?”
자영은 화가 났고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무공만 높았어도 놈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허허, 내 죄가 크다. 어쩌겠느냐,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러니 말이다. 일단은 이곳을 떠날 것인지, 그들과 싸울 것인지, 며칠 여유를 두고 생각해 보자! “
“......”
‘어쩌겠는가? 소연은 무룡에게 보내고 자영은 데리고 도망을 가는 수밖에... 이것이 상책이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야!’
태궁은 도망이란 최후의 수단을 생각했다.
태궁은 50년 전 마교(魔敎)의 실력자 중 한 명이었다.
현 마교 교주인 천무강과 각별한 친구 사이였고,
또한 젊은 시절부터 서로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능경화였으나 하늘도 무심하게 천무강의 애첩이 되었다.
그때부터 태궁은 배신이란 이름 앞에 무너져 실의에 빠져 살았다.
원래 내성적이었던 태궁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제대로 표현을 못 했다.
그랬던 자신을 자책하며 태궁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여인 경화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을 찾았을 무렵이었다.
공교롭게도 태궁과 천무강은 차기 교주의 물망에 올랐다.
그때부터 그들은 반목이 생겼다.
야망이 컸던 천무강은 권모술수와 온갖 간계를 동원해 태궁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의리를 중시 여겼던 태궁은 친구를 잃을까 염려하여 교주 경합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때 이 사실을 안 경화가 천무강 몰래 태궁을 찾았다.
소화는 태궁에게 자신도 태궁을 마음에 두고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교주 경합에서 절대 포기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태궁은 이미 지난 일이라며 경화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후 천무강은 경화가 자신 몰래 태궁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화가 난 천무강은 경화를 방안에 감금해 버렸다.
경화는 버림받은 신세에 감금까지 당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화가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궁은 고심 끝에 경화를 데리고 마교를 떠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한날 계획대로 경화를 데리고 마교를 도망쳤다.
태궁은 경화를 데리고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다.
그들이 숨어 산지 3년 만에 아이를 낳으니 딸이었다.
그들은 평범하게 살아갈 것을 하늘에 고한대로 딸을 키우며 20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딸이 혼인할 나이가 되자,
태궁은 딸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알고 지내던 사냥꾼 아들과 혼인을 시켰다.
그들이 혼인한 지 2년 만에 딸을 낳으니 태궁은 손녀를 보게 되었다.
태궁 부부를 비롯한 그들은 한 가족이 되어 나날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쳐왔다.
교주가 된 천무강이 어찌 알았는지 추적자들을 보냈고,
그들에 의해 가족들이 몰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손녀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경화는 마교를 도망쳐 나올 때 마교의 비전비기를 훔쳐 가지고 나왔었다.
교주가 된 천무강은 그때부터 수하들을 풀어 태궁을 쫓았다.
그렇게 20년이 흘렀지만 마교의 추적은 계속되었다.
결국엔 마교의 추적에 발각되었고 경화와 딸 그리고 사위가 죽임을 당했다.
다행히 태궁은 손녀를 안고 출타를 했었기에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태궁은 숨어살 은신처를 찾아 중원을 누비고 돌아다녔었다.
그러다 숲 속에 쓰러져 있는 한 여인과 계집아이를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인은 심한 상처로 그 자리에서 죽었고,
태궁은 어쩔 수 없이 여인의 딸인 계집아이를 거두게 되었다.
그 계집아이의 이름이 지금의 소연이었으며 나이는 2살이었다.
태궁은 그때부터 두 손녀를 데리고 이곳 만화곡에서 숨어 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룡이 업둥이로 자라게 된 그해 봄에 벌어진 일이었다.
5년 전이었다.
태궁은 두 손녀를 불러놓고 과거지사를 들려주며 소연과 자영이 친자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었다. 그때 소연과 자영은 많이 놀라긴 했지만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두 자매는 성격차이로 서로 다툼이 있기는 했어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런 두 자매는 태궁에게 있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손녀들이었다.
‘어쩌지 이일을 어째, 분명 마교에서 할아버지가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낸 거야, 무룡아! 어떻게 해,’
소연은 새벽에 따온 국화꽃잎을 손질하고 있었지만 건성으로 손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엔 온통 할아버지의 말씀만 맴돌았다.
자영은 방안 침상에 멍청히 앉아있었다.
온갖 상상이 자영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독한 마음이 절로 솟았다.
‘천태일! 네놈 이름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지, 내 부모님의 원수인 마교, 내가 너희 마교를 무참히 무너트려 주지, 천태일! 네가 그 디딤돌이 되는 거야, 결국엔 네놈도 내 손에 죽게 되겠지만 말이야!’
자영의 눈에서 푸른 독기가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무룡아! 나는 너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맹서 했었어, 지금 내 처지가 우습지만 너를 포기한 것은 아니야, 소연이도 안 됐지만 어쩔 수가 없어, 언젠가는 무룡이 너를 내 서방으로 만들 거야! 네 옆의 여인은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그래도 소연이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하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영의 입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 시각이었다.
천지봉 산자락이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천지봉으로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스스슥, 사사사삭, 스스사사삭,
몰려오는 어둠 속,
일단의 검은 인영들이 천지봉 능선을 타 넘고 있었다.
모두 네 명, 흑색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사나이들이었다.
그들의 몸놀림은 민첩하기가 날쌘 승냥이와 같았다.
그들은 하나의 산등선을 타 넘고 오리목나무가 무성한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는 들짐승들의 움직임처럼 들렸다.
오리목나무 숲은 이미 어둠에 덮였다.
사나이들이 숲 속으로 들어간 지 대략 일다경,
그들 앞에 제법 너른 분지가 나타났다.
분지에 언제부터 세워져 있었는지 군막이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 군막 안으로 사나이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군막 안은 환하게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네 명의 사나이들은 나무의자에 거만스럽게 앉아있는 사나이 앞에 부복했다.
군막 안은 살벌한 기운이 넘쳤다.
“왔으면 보고를 할 것이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냐!”
“공자님! 분부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럼 보고하라!”
“공자! 만화곡은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 사부님은 언제 오신다고 하더냐?”
“내일 오후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일이라... 알았다 쉬어라!”
“복명!”
사나이들이 바람처럼 군막에서 나가자 의자에 앉아있던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자영을 겁탈한 천태일이란 자였다.
‘내일이라... 사부님이 오시면 만화곡은 사라지는 것이다. 자영 낭자! 기다려라! 네 서방님이 간다. 어쨌거나 태궁 늙은이가 마공비록(魔功秘錄)을 갖고 있어야 할 텐데, 만약 없다면 늙은이는 죽은 목숨이다.’
천태일의 잔인한 미소가 불빛에 사악하게 느껴졌다.
우워- 우워- 우---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밤은 소리 없이 찾아왔고 들짐승들의 천국이 되었다.
원래 이곳 천지봉 일대는 많은 맹수들이 서식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먹을 것이 없는 겨울엔 산 밑의 촌락에까지 맹수들이 내려와 가축들을 잡아먹었다. 그럴 때면 농부들은 번을 서며 가축들을 지켜야 했다.
----------계속
비가 많이 옵니다.
비가 그치고 나면, 선선해진답니다.
모든 가정, 평안을 기원합니다.
^(^,
응원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긍정의 힘으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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