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이었다.
컴컴한 암동으로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굵은 장대비는 암동까지 점령하려는 듯 투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그런 와중에도 원세와 노인은 마주 앉아 한창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원세야,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할아버지! 이젠 그만하시죠.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사람은 죽이지 않습니다. 제가 무공을 익히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굳이 뭘 하겠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힘없는 약자들은 돕고는 싶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놈아! 청출어람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 참, 제자가 스승보다 낮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다. 내 평생에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었다. 네놈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월등한 재능을 가졌다.”
“할아버지! 절 달래려고 그러시는 거라면 입만 아플 겁니다. 그러니 그만 되었습니다.”
원세는 더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듯 휙 돌아앉았다.
순간, 노인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이는 노인이 화가 났을 때 전조의 증상으로 나타났던 바로 그 살기의 눈빛이었다.
“이놈! 빨리 돌아앉지 못할까?”
가슴까지 올라온 노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마도 원세를 만나기 전이였다면, 그 누구였더라도 가차 없이 손을 썼을 것이었다. 원세는 노인의 일갈에 소름이 오싹 돋는 살기를 느꼈다. 그렇지만 곧바로 돌아앉지는 않았다.
‘제길, 할아버지가 정말 화가 났나, 그래도 그렇지 내가 싫은데 어쩌라고, 그래도 지금은, 그래 할아버지 말씀은 끝까지 들어주는 게 도린데, 내가 잘못한 거네.’
원세는 진저리치듯 한차례 몸을 흔들곤 돌아앉았다.
“할아버지! 제가 말씀 중에 돌아앉은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원세는 진정성 있게 또박또박 말했다.
“어험, 잘못을 인정하니 이번은 내 용서하겠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이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정말 죽을 때가 됐는가, 어린애에게 손을 쓰려고 했으니, 원세야,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욱하는 성질 때문이다.’
노인 광마는 자신을 자책했다.
평생 처음 해본 자책이었다.
광마는 미친 마왕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살인을 밥 먹듯 저질렀었다. 특히 정사 대전 이후엔 그 광기가 절정에 달해 광마 자신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그 당시 광마가 할 일은 사황련의 재기였고, 련주의 아들을 훌륭히 잘 키워 새 련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광마는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무조건 힘으로 해결했다. 힘은 곧 살인이었고 마왕이란 소리를 듣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청출어람 말인데요. 제자가 스승을 능가한다는 것은 잘못된 말인 것 같습니다. 제자의 실력이 향상된 것은 전적으로 스승이 제자를 잘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원세는 눈을 질끈 감은 할아버지에게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대꾸도 없었고 눈도 뜨지 않았다.
“할아버지, 그러니 제자가 스승을 능가한다는 말은 가당치가 않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할아버지, 제가 이렇듯 훌륭한 무공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다 할아버지 가르침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할아버진 저를 살리신 은인이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누구를 죽여 달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다른 일이라면 이 원세가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할아버지, 맹세합니다.”
원세는 처음부터 노인을 불쌍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와 함께 암동을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도 해봤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벗어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질 않았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함께 나가자는 말도 못 꺼냈다.
원세는 정말이지, 날이 갈수록 할아버지가 좋아졌다.
그동안 어리광부리듯 투정도 부렸고, 심술도 부렸었다. 그랬음에도 할아버지는 큰소리만 쳤지, 손자처럼 대했다. 그만큼 광마와 원세는 조손처럼 가까워져 있었다.
‘이놈아, 네 뜻은 고맙다만 놈을 죽이는 일 외엔 부탁할 것이 없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일들은 네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부디 밖에 나가거든 정의로운 자를 만나거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무 자르듯 자를 수가 없느니라! 한번 길을 잘못 들면 헤어나기 어려우니,’
노인은 무슨 말인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할아버지! 장마가... 그냥 주무세요. 괜히 입만 아팠네.”
원세는 대답이 없는 할아버지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씰룩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원세의 얼굴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번쩍번쩍, 우르릉 콰쾅!
천둥 번개가 쳤고, 암동이 들썩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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