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기는 이른 시각이었다.
진 가장 별당 뒤뜰,
청의 노인이 샛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한 사나이가 뒤뜰로 다가왔다.
“의원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천수, 왔는가,”
사나이가 다가오자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무슨 근심이라도?”
“근심은 무슨, 자네야말로 근심이 크겠군.”
노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예, 네에, 걱정됩니다.”
“자네답지 않군, 그렇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원세 그놈은 사지(死地)에 갖다가 놔도 살아 나올 놈일세!”
“저야 의원님 말씀을 믿지만, 그래도 걱정이 됩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 그런데 말이야, 이 시간에 날 찾아온 걸 보면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네. 그려,”
“의원님! 분명하게 말씀을 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뭘 말인가, 말씀하시게,”
“일전에 하신 얘기가 무슨 뜻에서 한 말씀인지, 그 진의를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솔직하게 말씀을 해주시지요.”
“그 얘기, 별 뜻이 없었네. 그냥 흘려버리시게,”
“의원님! 어찌 그냥 흘려버립니까? 아들 문젠데,”
“그럼 그대로 믿던가, 난 탕약을 달여야 하니 그만 돌아가시게, 어험-”
노인은 담담하면서도 힘 있게 한 마디 하곤 돌아섰다.
“의원님!”
“못난 사람, 내 장담하건대 원세는 자네보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걸세! 그러니 자네는 자네 부부 걱정만 하시게, 아셨는가?”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담담히 말하곤 약방 쪽으로 걸어갔다.
열흘 전이었다.
장주의 명을 받은 천수는 읍내에 다녀오는 길에 조사의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볼일이 있어서 읍내에 나가는 길이라며 조사의는 은근히 이상한 말을 건넸다.
‘자네는 훌륭한 아들을 두어 좋겠네. 부럽네.’
‘의원님, 무슨 말씀인지?’
‘두고 보시게, 원세 그놈이 사람 구실은 제대로 할 걸세!’
‘노예 자식이 사람 구실을, 지금 누굴 놀리시는 겁니까?’
‘믿거나 말거나, 내 생각을 얘기했을 뿐이네. 자 그럼 또 보세!’
그때 언성을 높이긴 했으나 기분이 좋았고, 아이처럼 정말 그렇게 됐으면 하고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고 그 얘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을 동굴에 가두고 산에서 내려올 때 문뜩 의원 조사의 얘기가 떠올랐다.
사실 조사의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신의(神醫)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분이라 마음속으론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 조사의가 한 말이기에 뭔가 집히는 것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식을 사지에 가둔 처지가 되자, 그 연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생각다 못한 천수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불쑥 조사의를 찾았던 것이었다.
“의원님, 감사합니다. 원세가 돌아오면 그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천수는 노인이 사라진 곳을 향해 정중히 예를 드리곤 자리를 떴다. 그때 검은 인영이 별당 지붕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음, 자네 아들은 원양지체(元陽肢體)로 태어났네. 훗날 알게 되겠지만, 원세 그놈은 큰 인물이 될 것일세!’
약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조사의가 멀어지는 천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잠시,
방해를 받던 뒤뜰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때 고요를 깨우는 별빛들이 사락사락 속삭이며 내려왔다. 그리곤 매화꽃에 맺힌 새벽이슬에 살포시 내려앉아선 영롱한 빛을 피워 올렸다.
그 시각이었다.
원세는 동굴 벽을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철벙거리는 소리가 듣기 거북했다. 하지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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