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의 아들

검투사의 아들 11

썬라이즈 2021. 10. 4.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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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광마(狂魔).

오후가 되자 맑았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더니 저녁부터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건너다 보이는 량산은 검은 괴물처럼 버티고 서서 봄비를 즐기듯 몸을 내맡겼다. 한 번씩 바람이 지나칠 때면 괴성(怪聲)까지 질러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휘이잉- 휘잉- 휘이잉---

량산에서도 제일 험하다는 으스스한 계곡의 암벽이 봄비를 묵묵히 맞고 있었다. 계곡을 타고 올라온 바람이 암벽에 부닥칠 때마다 소름 끼치는 괴성을 질러댔다. 마치 죽은 자들의 원혼이 살아나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흔들거리는 횃불에 동굴 정경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바닥에 흩어져 있는 인골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울퉁불퉁한 암벽이 답답하다 못해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하동굴 속에서 한기를 몰고 온 비명 같은 바람 소리는 오싹오싹 소름을 돋게 했다.

지하 입구 옆, 바위와 나무상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때 검은 물체가 바위 위에서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 머리야, 아직 밤인가?”

잠에서 깬 원세는 오싹거리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가 크게 기지개를 켜듯 팔을 뻗었다. 그리곤 흔들거리는 횃불을 의지해 동굴을 다시 살폈다. 어둠에 익숙해진 탓일까, 시력은 밝아져 있었고 동굴은 처음 그대로 이상이 없었다.

꼬르륵, 꼬르륵, 꼬륵,

제길 이런 상황에서도 배가 고프네. 아이고 배고파,”

원세는 옆에 놓인 보따리를 집어 들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움직이질 않았다. 다소 겁에 질린 표정이긴 했지만, 눈빛은 그 어떤 두려움도 겁날 것도 없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백일을 버티려면 한 달 치 건량으론 어림도 없다. - 주인 어르신도 너무 하셨지 한 달 치 건량이 뭐야, 어쩔 수 없지 삼일에 한 끼로 때워야지---”

원세는 보따리를 도로 내려놓고는 바위에서 내려섰다.

---

지하에서 올라온 냉랭하고 습한 바람이 몸을 엄습하자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다고 바람 소리가 두렵거나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다. 원세가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한 달 치 건량으로 백일을 버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버티지 못한다면 첫째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이요. 둘째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할 여랑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다.

여랑은 가끔 확인하듯이 원세에게 말했었다.

‘언제 까지든!’

그때마다 원세는

암요. 아가씨는 이 원세가 평생 지켜드리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했었다.

그렇게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면 원세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었다. 정말로 여랑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저놈의 횃불이 왜 저래---”

동굴을 밝히던 횃불이 심하게 일렁거렸다.

횃불이 꺼지면 큰일인데,”

원세는 횃불로 다가가 살폈다.

솜방망이에서 아름다운 불똥이 피어올랐다가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횃불의 수명이 다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횃불이 이대로 꺼진다면 원세로서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을 것이었다.

제기랄, 기름 그릇이 어디 있을 텐데?”

마음이 급해진 원세는 이미 살펴본 동굴을 다시 살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바닥에 널린 인골들뿐이었다. 잠시 지하를 바라보고 섰던 원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위 옆에 놓인 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곤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하나둘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세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일렁거렸다.

물건을 끄집어내는 손도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끔찍하게 죽였을 거야,”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은 죄인들을 포박하고 고문할 때 사용했을 밧줄과 쇠사슬, 가죽 채찍, 녹슨 넓적한 도끼, 육각으로 만든 몽둥이와 뾰족하게 돌기가 솟은 쇠몽둥이 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끝이 예리한 몇 개의 단검이었다. 하나같이 죄인들을 다룰 때 사용했을 물건들뿐이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원세는 동굴에 들어왔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바닥에 널려있는 인골들만 봐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하더라도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원세도 두려움을 떨쳐버리진 못했을 것이었다.

원세는 아버지를 굳게 믿었다.

그것은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들을 사지에 가둘 분이 아니며, 아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고 믿으셨기에, 오늘 같은 일을 행하셨을 것으로 생각했다. 원세는 몰려드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는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 원세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고 지금까지 잘 버텼다. 그런데 의외의 고문 도구들을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음이었다.

제길, 이를 어쩌지, 횃불이 없으면 큰일인데, 으휴-”

원세는 바닥이 드러난 상자를 들여다보며 낙심한 나머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동안 잘 견뎠던 얼굴에도 두려움의 그림자가 서서히 어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일 다경 정도 서 있었을 것이다. 원세는 고개를 돌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노려봤다. 지하로는 내려가지 말라는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뭔가는 해야 한다고 원세는 생각했다.

혹시 모르잖아, 지하에 다른 횃불이 있을지, 어차피 백일 동안 살아남는 일은 내 몫이다. 그래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

원세는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쇠몽둥이처럼 묵직했고 손에 잡히는 감촉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는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 으 휴--”

왼손엔 꺼져 가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엔 몽둥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곤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기가 몽땅 빠져나간 것처럼 다리엔 힘이 없었다.

가파른 계단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사람 세 길쯤 되는 지하는 어둠으로 인해 무엇이 있는지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갈 때마다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엔 힘이 빠졌고, 비릿하고 역한 냄새만 심하게 코를 자극했다. 창자가 꼬이는 구역질이 났지만 참았다.

앞으로 한 식경이면 횃불은 그 수명을 다하고 꺼질 것이다. 횃불이 목숨 줄인 기름을 먹지 못해 꺼지듯이 원세도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이제 16, 한창 클 나이요. 원대한 꿈도 키울 나이다. 그렇게 생사의 기로(崎路)에 선 원세는 앞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철퍽-

흐윽!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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