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과 생각

단편소설/옥녀의 재혼 1

썬라이즈 2021. 9. 14.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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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의 재혼

 

글 / 단야(박완근)

 

열흘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열대야 현상으로 밤잠을 설쳐야 했다.

 

어느 읍내의 행복동 재래시장,

예외 없이 행복동 재래시장도 푹푹 찌는 열대야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던 재래시장 입구,

풍년 쌀집이란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쌀집 주인인 만수가 직접 만들었다는 간판이었다.

그것도 풍년은 파란색으로 쌀집은 빨간색으로 커다랗게 써넣은 글씨가 유독 사람들 눈에 잘 띄었다.

그리고 쌀집 옆엔 믿음 세탁소가 있었다.

그 옆엔 부부 미용실인데 굳게 문이 닫혀있다.

아마도 가족동반 피서를 떠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시장통 양쪽으로 늘어선 크고 작은 가게들도 거의 문을 닫아걸었다.

 

이 찜통더위에 장사가 되겠는가,

그들도 더위를 핑계로 피서를 떠났을 것이다.

밤잠을 설친 만수는 늦게 가게 문을 열었다.

그리곤 건너편 란제리 전문점을 바라다봤다.

 

아침나절인데도 마구 쏟아져 내리는 땡볕으로 열기가 30도를 웃돌았다. 특히 폭이 15미터쯤 되는 황톳길 시장통은 뽀얗게 뿜어져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로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그 열기 사이로 건너편 란제리 전문점이 아른거린다. 마치 이글거리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란제리 전문점은 만수의 눈을 현혹했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이---

다음 날 아침 9시경이었다.

란제리 전문점 유리문이 천천히 열렸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하늘거리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문밖으로 나왔다. 여인은 사뿐사뿐 걸어서 그늘도 없는 가로등 옆에 서더니 쌀집을 건너다본다.

 

목이 깊게 파인 원피스로 인해 여인의 탐스럽게 솟은 젖무덤이 반쯤 드러나 보였다. 여인의 도발적인 몸매는 마치 속옷을 입지 않은 여인을 본 듯 상상만으로도 욕구 충족이 될 정도였다.

 

여인은 연신 손부채질을 해대며 누굴 찾는지 풍년 쌀집을 쳐다봤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여인이 뭔가 언짢다는 듯 손부채질을 세차게 해대곤 총총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만수는 쌀집 가게 주인이다.

5년 전 상처하여 두 딸만 데리고 사는 40세를 넘긴 홀아비다. 큰딸 영미는 엄마를 닮았는지 달밤에 하얗게 핀 박꽃처럼 순수하게 예쁘다.

 

암튼 만수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한 번씩 죽은 마누라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죽은 마누라가 절절히 그리운 것은 아니다. 다만 불치병으로 죽은 마누라가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만수의 마누라는 진행성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도 아프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냉정하게 죽음을 기다린 마누라였다. 그런 마누라가 만수의 눈엔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진행성 위암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존재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위암 초기에는 특별한 증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위암은 조기 발견이 어렵단다.

 

마누라 역시 위암 말기가 돼서야 유문부(위와 십이지장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 폐색에 의한 구토, 토혈, 빈혈, 흑변 등으로 끔찍한 고통을 당했고, 분문부(위가 식도와 연결되는 부분) 침범에 따른 연하곤란 등의 증상으로 숨쉬기조차 어려운 고통을 당했다.

 

마누라는 그런 끔찍한 고통마저도 고스란히 가슴으로 삭혔다. 그런 마누라였기에 만수의 눈엔 마누라가 한 여인으로서 숭고할 정도로 위대해 보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누라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 의식의 끈을 붙잡고 속삭이듯 만수에게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만수의 귓가엔 생생하다.

여보! 고마워요.’

만수는 마누라의 손을 잡고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요. 우리 딸들을 낳았을 땐 산통도 기뻤고,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마구 흘렀지요. 당신과 딸들을 두고 먼저 떠나려니 마음이 아프긴 하네요. 그렇지만 여보! 그동안 당신의 우직한 사랑과 우리 딸들의 사랑 때문에 정말로 행복했답니다. 여보, 당신과 딸들의 사랑만 받다가 이렇게 훌쩍 떠난다니까 내가 밉지요. 하지만 여보! 미워하지 마세요.’

만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누라 손만 굳게 잡았다.

 

사실 그때는 바닷속이 해일에 뒤집힌 것처럼 몸 안의 모든 것들이 울컥울컥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그 울컥거린 아픔들이 용암처럼 뜨거운 눈물로 화했지만, 만수는 끝내 울지도 못하고 억지로 미소만 지었었다.

여보!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세요.’.’

말만 해요. 무엇이든 다 들어줄게요.’

만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어떤 부탁이든,

정말이지 같이 죽자고 해도,

기꺼이 같이 죽을 맘으로 대답했다.

여보! 내가 죽거든, 우리 딸들을 생각해서라도 일 년 후엔 꼭 재혼하세요. 그래야 저승에서도 마음이 놓일 거예요. 당신은 성실하고 착한 분이니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여보! 우리 딸들을 위해서예요. 아셨지요. 애들에겐 새엄마가 있어야 해요.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너무 어처구니없는 마누라의 유언이었다.

그런데도 알았어요.’ 대답한 만수였다.

 

만수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 마누라가 죽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1년도 못 살 마누라를 3년 가까이 극진히 보살핀 만수의 마누라 사랑을 칭송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어쨌거나 만수는 꿈에도 잊지 못할 마누라의 박꽃 같은 영상을 끌어안고 5년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가게 일을 소홀히 했다거나 딸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못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더 지독스럽게 일에 매달렸고 딸들이 귀찮아할 정도로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간섭하고 챙겼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 남들에겐 아집에 갇혀 사는 불쌍한 홀아비로 인식되기도 했다.

 

만수는 한 번씩 마누라 사진을 붙들고 청승을 떨며 눈시울을 훔쳤다. 그것이 마누라를 못 잊어서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딸들에게 들켰다. 그 일로 딸들에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고 함께 울기도 했었다.

 

이젠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닌다. 큰딸은 여고 1학년이 되었고 막내는 중학교 2학년이다. 딸들은 커갈수록 제 엄마를 닮아갔다.

 

만수는 그런 딸들을 지켜보며 마누라의 영상들을 조금씩 지워갈 수가 있었다. 게다가 아주 특별한 일이 만수의 마누라 영상을 지우는데 한몫을 했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자리한 란제리 전문점 여주인인 옥녀가 그 원인이었다.

 

그러니까 란제리 전문점은 만수의 박꽃 같던 마누라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문을 연 가게였다. 그때 3살쯤 된 아들을 데리고 란제리 전문점을 연 여인은 옥녀라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누가 봐도 20대 초반의 처녀로 보였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시장 사람들은 옥녀에 대한 갖가지 억측들을 쏟아냈다. 처녀가 애를 낳아 도망쳐온 것이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억측들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정식 결혼한 이혼녀였다.

 

그리고 금 년 봄,

옥녀는 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학부모가 되었다. 지금의 옥녀는 그때 그 아름다움보다 더욱 성숙한 아주 잘 익은 과일처럼 달콤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여인으로 성숙해 있었다..

 

옥녀는 이혼녀다.

일 년에 한두 번 애 아버지가 아들을 보기 위해 다녀가는 것이 만수의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만수는 애 아버지가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만수의 처지에서는 마누라가 살아만 있어도 좋아서 죽을 지경일 텐데, 아름답고 착해 보이는 부인과 이혼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만수는 이웃으로서 옥녀와 반갑게 인사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이맘때 가족들과 함께 물놀이를 갔었다. 그때 만수의 눈에 옥녀가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옥녀 또한 만수를 남자로 보았던지 가끔 특별한 음식을 했다면서 가게로 가져오기도 했었다.

 

암튼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냈다.

만수와 옥녀는 서로의 속마음을 내보이지 못했다.

 

사실은 자식들 때문이었다.

둘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허전함을 달랬다.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 어느 날,

땡볕이 쨍쨍 쏟아지던 정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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