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아버지의 손에 끌려간 지, 한 시진이 지났다.
여기저기 등불이 내 걸린 장원은 적막이 감돌았다.
그때 한 허름한 전각인 와가(瓦家) 안에서 여인의 흐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흑, 불쌍한 내 아들, 어쩌겠느냐, 부모 잘못 만난 탓인걸, 하지만 원세야! 너는 종이 아니다. 이점 명심해라. 그리고 아들아! 언젠가는 아버지께서 내력에 대해 다 말씀을 해주실 것이다. 으흑, 흑흑,”
흐릿한 불빛에 드러난 방안은 깨끗하긴 했다.
서책 몇 권이 놓여있는 책상 앞이었다. 한 여인이 흐느끼며 서책을 쓰다듬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상심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뜯어볼수록 인자해 보였고, 비록 남루한 치마저고리를 입고는 있었으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기품이 있었다.
여인은 아들을 사지(死地)에 가두기 위해 산속으로 사라져 가는 지아비와 아들을 지켜봤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들을 끌고 가는 지아비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가슴은 미어지다 못해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배웅한답시고 나온 사람들의 가식적인 위로에 여인은 슬픔을 삼키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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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아들 걱정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바로 그 시각이었다. 막 구름 자락을 밀치며 만월이 얼굴을 내밀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어둠에 묻힌 산세와 으스스한 계곡이 흐릿하게나마 정경을 드러냈다.
그때 소년과 무사가 계곡으로 내려섰다. 계곡으로 들어서자 선선한 바람이 지나갔다. 이마와 등줄기로 비 오듯 흐르던 땀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밤바람은 차가웠다.
휘리링- 휘잉-
헉, 헉, 헉헉,
소년은 단내가 날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원세야!”
“예, 아버지!”
“힘이 드느냐?”
“아, 아닙니다. 아버지!”
“야밤에 산을 탄다는 것은 사냥꾼이나 아비 같은 무사라 할지라도 쉽지가 않다. 그러니 내 앞에선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하거라. 난 네 아버지니라!”
“아버지! 정말 참을 만합니다.”
이제 나이 16세, 원세에겐 힘든 산행임이 분명했다. 그것도 칠흑 같은 야밤에 무사인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잡기는 쉽지가 않았다. 숨이 턱에 찼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쉬었다가 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소년은 끝내 말하지 못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아버지, 저는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인데 요?”
“그럴 것이다. 이곳은 계곡이 험해 사냥꾼들도 잘 오지 않는 비밀스러운 곳이다. 그리고 동굴은...”
“아버지! 동굴이 어쨌게요?”
원세는 아버지가 말끝을 흐리자 걸음을 멈췄다.
“가서 말해 줄 것이니, 조심해서 아비 뒤를 따르거라!”
천수는 묵직하게 일갈하곤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원세는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천근만근인 다리를 끌며 아버지를 따라갔다.
우—우--
‘저놈의 늑대 새끼, 달만 뜨면 운다니까,’
만월이 구름을 밀치고 얼굴을 내밀어서일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 같았으면 달밤에만 구슬프게 울어대는 늑대를 보고 불쌍한 늑대 새끼라고 투덜거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늑대의 울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려왔다.
‘원세야! 너에겐 아비의 전철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부디 강하게 자라야 한다. 이 세상은 약자(弱者)는 죽고 강자(强者)만이 살아남는 곳이란다. 힘을 내라!’
한낮에도 계곡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천수는 한 번씩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가 힘들게 일어서는 아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대략 30장쯤 갔을까, 천수가 걸음을 멈췄다.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삼면을 가로막고 있는 곳이었다.
원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늘에 맞닿은 절벽을 올려다봤다. 마치 세상을 가둔 철벽처럼 무섭게 보였고, 이곳 어딘가에 자신이 갇힐 동굴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어지간한 일엔 놀라지도 않던 원세였지만 오늘따라 두려움과 공포까지 느꼈다.
“두려우냐?”
“... 아,. 두렵지 않습니다.
천수는 아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쓰럽다거나 걱정스럽단 목소린 아니었다. 냉기가 흐를 정도로 차갑고 묵직했으며 사내대장부가 이따위 일에 겁을 먹느냐, 호통치듯 나무라는 투였다. 원세는 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에 말을 더듬었다.
‘제길, 아버지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원세는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었다. 아니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훈육에 따라 당당해 보이려고 애를 썼었다. 특히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작심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 앞에서 내보이고 싶지 않은 나약한 모습을 내보이고 말았다. 대장부로서 부끄럽고 자책감마저 들었다.
“원세야! 이리 와 앉아라!”
“예, 아버지!”
원세는 아버지가 앉은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원세야! 동굴은 지하 감옥이다.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가 죽어 나갔다.”
“그러면 아버지! 지금도 갇혀있는 사람이 있나요?”
“아마도 살아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장주의 명을 어긴 자가 일 년 전에 갇히곤 네가 처음이니라!”
“그럼 그 사람도 죽었겠네요.”
“죽었겠지, 아무튼 원세야! 백일 후, 네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모든 진실을 말해 줄 것이다. 그리 알고 굳건하게 견디어 내 거라!”
“......”
원세는 아버지가 노예 신분이 된 연유를 여러 차례 여쭤봤었다. 그러나 대답은 때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었다. 무슨 말 못 할 연유가 있으리라 짐작했기에 지금까지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백일 후면 자신의 내력뿐만 아니라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것이었다.
“원세야! 네가 고원 세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라! 이 아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원세 너를 믿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만날 때까지 꿋꿋하게 버텨야 할 것이다.”
따뜻하게 아들의 손이라도 잡고 말했다면, 원세는 용기는 물론이고 두려운 마음도 싹 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천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어둠에 잠식당한 계곡만 직시한 채 엄엄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 고원셉니다. 백일이 아니라 일 년이라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냐? 허허허--”
어둠을 흔든 아버지의 공허한 웃음소리에 원세는 울컥 설움이 복받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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