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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에 한국의 뿌리

썬라이즈 2022. 2. 1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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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 속에 한국의 뿌리를 찾아서


권해조 (육군준장(예), 육사 초빙교수)

일본은 한국과 가까운 이웃국가로 옛날부터 왕래가 많았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일본 건국과 문화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말하는 자도 많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인은 기마 민족(騎馬民族)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주장하고 있듯이 일본인은 우리와 같이 우랄 알타이계로 얼굴 생김새나 말의 어순도 비슷하다.

지금도 도쿄 아카사카(赤坂)나 우에노 아메요코(橫) 시장의 김치 골목에 가면 한국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 이름의 상점이 많다. 또한 최근에 일본 동북부 최고 두메산골인 야마가다(山形) 도자와 무라(戶澤村)란 작은 마을에도 한인촌을 형성하여 고려관(高麗館)을 세우고 도자 와류 김치로 유명해지고 있다.

필자는 일본에서 근무할 때 일본의 언어, 지명, 성씨, 도예 등 여러 곳에서 우리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필자가 일본 속에서 찾아본 한국의 뿌리 가운데 일부분을 소개하는 것인데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2. 일본어 속의 韓國語

옛날에는 글(文字)이 있기 전에 말이 먼저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글이 있기 전에 이두(吏讀) 문자가 있었고 일본도 9세기경 한자의 한 부분을 따서 표음문자로 만든 가나(伽名)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물론 일본 역사책에도 4세기경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가서 한자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삼국시대에 많은 문물이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일본에 처음 가서 하늘이 ‘구모리(曇)’하여 비가 올 것 같다는 일본말이 우리말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어 속에 한국어를 찾아보았으며, 현재 쓰이고 있는 일본어에 경상도 전라도의 옛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었다.

일본에서 우리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구마모토 지역에서는 우리말 네(ye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규수 사쓰마(薩摩) 반도에서는 가루를 치는 ‘체(sieve)’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접속사 ‘~가, 어미 ~다, 의문문 ~까?’ 등도 우리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의태어(擬態語)와 의성어(擬聲語)에는 비슷한 것이 많았다. 키가 ‘쑥쑥’ 자라다를 ‘수구 수구’로, ‘슬슬’ 걸어가다를 ‘소로소로’로, 얼굴이 ‘까칠까칠’하다를 ‘까사 까사’로, ‘깔깔’ 웃다를 ‘까루 까루’로 크게 우는 소리 ‘어이어이’를 ‘오이 오이’로 까마귀 우는소리를 ‘가아 가아’로 닭 우는 소리를 ‘고께고꼬’로 매미 우는 소리를 ‘민민’ 등 대동소이한 것이 많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일본어 시마(島)는 경상도 방언 서마에서, 무라(村)는 우리나라 마을에서, 고 호리(郡)는 고을에서 유래되었으며, 구다라(百濟)는 원래 큰 나라(大國)에서 군 나라- 구다라로 변천하였고, 규수지방 방언인 오도 무이(무섭다)는 우리말 무덤(墓)이 무더무- 오도 무로, 히(日)는 해에서, 히카리(光)는 빛깔에서, 우에(上)는 위에서, 쫀가(總角)는 총각에서, 도무다치(友)는 동무들에서 변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후쿠오카 지역에는 지금도 줄다리기를 할 때 ‘영사 영사’를 외치고 있고, 오사카시의 조선통신사 재현 축제에는 ‘왔쇼이 왔쇼이 꼬랴 삿토 왔쇼이’를 외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어 어원이 상당 부분 우리말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며 아직도 여러 곳에서 우리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3. 일본 속의 韓國 地名. 寺刹名

우리는 일본의 나라(奈良)가 우리말 나라(國家)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어왔다. 백제가 망하자 일본에 망명자들이 나라(國)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기분으로 살자는 뜻에서 ‘나라(奈良)’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 속에서 고대 우리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삼한시대 한국의 이름과 같은 지명(地名), 사찰명(寺刹名)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우리나라 문화가 일본으로 많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선 고구려와 관련 있는 이름을 찾아보면 사이타마 현 이루마(入間)군에 있는 고려 향(高麗鄕)을 들 수 있다. 이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 직전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사신으로 갔던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장군 일행이 귀국하지 못하고 주위에 고려향(高麗鄕)을 만들어 오늘까지 1300여 년간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고려 진자(高麗神社)가 있는데 현재 약광 59대손 고마스 미오(高麗澄雄)가 궁사(宮司)로 있다. 그 주위 산을 고마산(高麗山), 강을 고마센(高麗川), 기차역을 고마에 끼(高麗驛)로 부르고 있다. 나라, 교도, 오사카 지역에도 고 마마치(高麗町), 고마바 시(高麗橋), 나라의 아스카(明日香)에 도다이지(東大寺), 규수지방에도 고마마치(高麗町), 고마바시(高麗橋), 고마도리(高麗通) 등이 있다.

신라와 관계되는 지명은 일본 서부 니가타(新瀉), 도야마(富山), 이시까와(石川), 후꾸이(福井) 지역에 많다. 신라는 3국 중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으며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살았다.

니가타(新瀉) 현의 사도시마(佐渡島) 오 끼 마치(小木町)에는 신라인이 모여사는 신라촌(新羅村)이 있고 지금도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을 조상으로 모시고 장자상속(長子相續)의 전통을 이어가며 15여 가족이 살고 있다.

또한 니카타에는 시라 기진 쟈(新羅神社), 신라 왕비(新羅王碑), 시라 키진 쟈(白木神社) 등이 있고, 교도 나라 지역에도 시라 키진 쟈(新羅神社), 사라 키지(新羅社), 지금은 이름을 바꾸었지만 오사카의 도돈 보리(道頓堀) 하천에 시라키 바시(新羅橋) 등이 있다.

그리고 시가(滋賀) 현 오쓰시(大津) 시에 신라사(新羅寺)와 장보고 장군을 모신 사당인 신라선 신당(新羅善神堂), 시마네(島根) 현 오타(大田) 시에는 한신 신라 신사(韓神新羅神社), 규수 가고시마현 다루미즈(垂水) 시에는 박혁거세 왕을 제신으로 모시는 거세 신사(居世神社)가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지명은 교도 나라 오사카 지역과 규수 지역에 많다. 오사카와 교도 사이 마이반(枚方)에 왕인공원, 백제 사적공원, 쿠다라지(百濟寺), 쿠다 라진 쟈(百濟神社) 등이 있고, 나라 지역에 쿠다라 에키(百濟驛), 쿠다라 무라(百濟村), 쿠타 라가와(百濟川), 쿠다라 바시(百濟橋), 아스카(明日香村)에 아스카지(飛鳥寺), 백제 소학교 (小學校)가 있고. 오사카 지역에는 4대 왕사(四大王寺)가 있다.

규수 휴가(日向) 시에서 40킬로 떨어진 남향촌(南向村)에 쿠다라 사토(百濟里)란 백제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 정가왕(禎嘉王)을 모신 신문 신사(神門神社)가 있다. 그리고 최근 부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야자키(宮埼) 시에 조성된 백제마을에는 국립 부여박물관과 같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으로 백제관(百濟館)과 언덕에는 낙화암 백화정(百花亭)을 모방한 백화정(白花亭)을 건립하였다.

그밖에 가야 삼한과 관련 있는 지명으로는 나라, 오사카 지역에 가라쿠 니신사(辛國神社:종전 韓國神社)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규수 지역과 대마도 지역에서 많다. 규수지역 가고시마현에는 환웅과 단군을 제신으로 모시는 환단 신사(桓檀神社), 가야 김수로왕의 7 왕자 유적(七王子 遺跡), 카라 구니다케(韓國岳) 등이 있다. 규수 사스마(薩摩) 반도 가세다(加世田) 시의 니니 기노 미코도(藝名) 유적은 가야 김수로왕의 7 왕자가 일본에 도래하여 다가치 호미네(高千穗峰)에 강림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전설과 일본 사기, 고사기를 토대로 ‘일본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다가치호미네 인근 가라쿠니다케(韓國岳)는 해발 1,700미터로 일본 진무 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인 니니기 노미 코토가 산 정상에 올라가서 고국 출생국인 가야(伽倻)를 바라보며 “여기가 가라쿠니(駕洛國)을 향하고 있으니 좋은 곳이다” 라고한 조칙(詔勅)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구마소 성(熊襲城) 근처에는 가야 신을 모시는 가라쿠니 우도 우미네 신사(韓國宇豆峯 神社)가 있다.

또한 일본의 산 이름도 보통 야마(山)로 부르지만 후지산(富士山), 아소산(阿蘇山), 아오카키산(靑垣山) 등 우리나라와 같이 산(山)으로 부르는 것이 많이 있다. 하천도 보통 가와로 부르지만 에노센(可愛川), 가 수노 센(葛野川), 누다센(沼田川) 등 한국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도 통상 테라(寺)로 부르고 있으나 호류 우지(法隆寺), 도다이지(東大寺), 고류지(光隆寺) 등 우리와 같이 절(寺)로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고대 한국의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됨에 따라 한국의 지명이 지금도 일본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 4. 일본 속의 韓國姓氏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 부여 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 사람 수수 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 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 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 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 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 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 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 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 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 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 포고”라는 “신분해 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 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 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 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 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 씨를 하려니 갖가지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 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대 큰 뱀(大蛇), 여우 코(狐鼻), 메도 키(百目鬼), 히토 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기), 시나 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 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 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게(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 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 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 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 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 교수도 ‘신찬성 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인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 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 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 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 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5. 일본 속의 韓國陶瓷器

일본 도자기의 주요 생산지는 대부분 규수(九州)에 위치하고 있다. 규수의 가고시마(鹿兒島), 사카(佐賀), 나가사끼(長埼), 구마모토(熊本), 후쿠오카(福岡), 인접 야마구치(山口) 등에 산재하고 있다. 이들 도자기의 시작은 대부분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끌려온 우리 선조 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소위 일본도예의 3대 거봉(巨峰)이라고 일컫는 사스 마야 키(薩摩燒), 가라스 야키(唐津燒), 아리다 야키(有田燒)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이름 있는 하기야키(萩燒), 아가노 야키(上野燒)등 모두가 우리나라 선조들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도예의 뿌리는 우리나라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가고시마 사쓰마야키(薩摩燒)이다. 이는 자기와 도기를 동시에 구워내는 것이 특징이며 초기에는 질그릇, 다기(茶器)가 주산이었으나 지금은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들이 만들어 내는 고급 도예품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쓰마야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심수관가(沈壽官家)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라도 남원 전투에서 패한 후 약 70여 명의 도공이 3척의 배에 실려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박의평(朴平意) 심당길(沈當吉) 등 43명이 탄 배가 규수(九州) 가고시마(鹿兒島) 시마비라(島平) 해변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5년간 살다가 1603년 12월 현재의 나에 시로 가와(苗代川)의 미야마(美山) 마을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미야마는 200호의 세 대중 100호 정도가 도공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그 가운데 400여 년간 14대째 유업을 이어온 심수관(沈壽官) 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필자가 심수관 씨를 만나 오늘의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만들어 낸 심수관가의 경험담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초대 심당길(본명은 讚)이 일본에 끌려와서 말도 통하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도구로 천대받으면서 굶주리고 고생하던 쓰라린 경험과, 일본 도착 16년 후에야 백토를 찾아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 끈질긴 장인정신으로 오늘의 사쓰마 야키(薩摩燒)를 일구어낸 도공들의 애환(哀歡) 어린 이야기는 정말 한 편의 역사책이었다.

수관(壽官)이란 예명은 12대 조 부 때부터 사용했으며, 13대 부친도 교도(京都)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세계적인 도예가였다. 본인도 마을에 의사가 없어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정치학을 공부하여 마을을 대변할 수 있도록 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와세대(早稻田)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부친의 업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특히 부친께서는 “인생이란 긴 사슬 가운데 한 개의 고리에 불과하다.

너도 그 사슬에 한 개의 고리를 걸면 된다”라고 말씀하신 부친의 철학적인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필자가 본 심수관은 일본의 최대의 도예가뿐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부친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직도 한국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항상 고국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애국자가 틀림없었다.

또한 사쓰마(薩摩) 야키에는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번주(藩主)의 보호 아래 1601년 가마를 연 가고시마현 다테노(堅野)계가 있고, 다음은 1608년 방중(芳仲)이 중심이 되어 연 가마가 있다. 이 가운데 김해는 29세의 나이로 도평에서 4킬로 남방 가미노가와(神之川) 부근에 10여 명 일행과 도착하여, 번주(藩主)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사쓰마야키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고 52세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우선 본명이 불명하며 일본 번주의 허락 하에 호시야마 나카지(星山 仲次)란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호를 김해로 사용하였다. 그는 경북 성산 사람으로 가마가 있던 산도 성산이라 불렀고 김해가 고향이라 호를 김해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두 번째로 사카현(佐賀縣) 가라스 야키(唐津燒)다. 특징은 고회유(藁灰釉)를 많이 사용은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과 일찍 왜구 일당인 마쓰우라(松浦) 도당들에게 잡혀갔거나 그들의 유혹에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자기이다.

특히 한강 이북 출신 도공들이 이곳에서 일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이며, 이중 나가사토다로 우에몬(中里太郞 石衛門)은 일본을 대표하는 도예가이며 그의 부친은 국보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세 번째인 사가현의 아리다 야키(有田燒)다. 이는 우리나라 행남도자기, 한국도자기와 같은 대중 사기그릇 도자기가 주종이다. 정유재란 때 공주에서 끌려와 사카현(佐賀縣) 아리타(有田) 지방에서 문을 연 이참 평(李參平)이 시조다. 그는 오랜 고행 끝에 1616년 석영분이 많은 도석(陶石)을 발견하여 일본 백자 아리다 야키의 도조(陶祖)로 숭상받았으며, 가네가에 산 베어(金江三兵衛)란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1655년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아리 다시는 매년 4.29 - 5.6일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리 다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마을 뒤편 도산(陶山) 공원에는 조그만 돌비석과 묘소가 있다. 그리고 아리다에는 현재 700여 개의 도자기 상점이 줄지어 있고 이참 평 13대 손도 도공으로 일하고 있으나 미미한 존재이다.

그 밖에도 1604년 한국 도공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 형제가 야마구치(山口) 현의 마스모토 야키(松本燒)에서 시작한 하기야키(萩燒), 조선도공 팔산(八山)에 의해 시작된 후쿠오카의 다가 도리 야키(高取燒), 조선도공 존해(尊楷)에 의해 시작된 구마모토현 아가노 야키(上野燒), 조선인 웅천(熊川) 출신 거간(巨關)에 의해 시작한 백자 세공이 특징인 나 가사 끼 현의 미가 와우 치야키(三川內燒)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우리 선조들이 전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 도자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일부는 조선일보 만물상에서 발췌/모셔왔습니다.

^(^, 일본이 정신 차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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