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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잃어버린 우리의 고토

썬라이즈 2022. 2. 7.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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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 잃어버린 우리의 고토

▲ 광개토대왕 및 광개토왕비 위치도 위 적색의 집안(集安) 시 <적색 부분 탐방일 2012.8.1~8.6>

▲ 집안(集安) 시 위치도

▲ 집안시 중 광개토대왕 능,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세부 위치도


1. 광개토대왕릉

광개토태왕 -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高談德)

광개토 대왕은 고구려를 동 아시아가 대제국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인물이다. 광개토 대왕은 근초고왕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어 거란을 정벌한 후, 빼앗긴 영토를 다시 찾으려는 백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임진강 이북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남쪽의 위협을 없앤 고구려는 침략했던 북쪽의 나라들을 공격하여 요동, 요서 지방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광개토 대왕 때의 고구려는 북으로 헤이룽강, 남으로 임진강, 동으로 연해주, 서로는 내몽고와 중국 북부에까지 세력을 떨친 대제국이 되었다.

▲ 광개토대왕릉 (중국이 세계문화유산 등록한 것 중에 중국을 침략한 고구려 왕이라고 관리가 엉망인 모습들)

▲ 각종 잡초가 난무한 능 주변의 모습들

● 광개토대왕(375-413)의 정책

1. 18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21년간 백제를 누르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물리쳤으며 북쪽의 여러 부족 국가를 굴복시켜 대제국을 건설함

2. 경제가 발전해야 국력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농부들을 격려하였고, 사냥도 장력하여 씨름 대회, 팔씨름 대회, 활쏘기, 말타기 등의 무술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함

3.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소년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은 거룩한 단군의 자손으로 굳센 민족이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란 것을 깨닫게 해 줌

● 광개토대왕의 업적

1. 392년 백제 북쪽의 여러 성을 함락시켜 한강 북쪽의 많은 영토를 차지함

2. 400여 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 명의 원군을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침

3.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고, 이어서 북부여를 무릎 끓게 함

4. 고구려의 영토는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 쑹화강,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랴오허강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함

▲ 광개토대왕 묘실 입구 (주변이 어수선하고 관리가 엉망이다. 2012.8.4 당시의 모습)

이름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로서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이를 줄여서 광개토태왕()으로 부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위 시의 칭호는 영락 대왕(永樂大王)이었는데 , '영락()'은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로 알려져 있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대방()을 탈환하고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
광개토왕 6)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 나라의燕 모용희()를 반격하여 신성()·남소()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의 모용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
()과 목저성()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능은 소재 미상이나 414년 장수왕이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건립한 광개토대왕릉비
에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광개토대왕 연표]

391년  광개토대왕 즉위
392년
 백제 공격하여 10성 함락,
 거란을 정벌하여 500여 명을 포로로 함
393년  백제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
 평양에 9사() 창건하여 불교 장려함
394년
 백제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승리,
 남쪽에 7성을 쌓음
395년  백제와 패수(浿)에서 싸워 승리, 비려() 정벌
396년  백제 공격하여 58성 차지,
 
백제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잡아 옴
397년  후연의 요동성을 점령함
398년  숙신을 정벌함
399년  백제· 왜 연합군 신라 칩입,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 요청
400년  백제·가야·왜 연합군 격파
402년  후연의 숙군성(宿)을 침
403년  후연을 공격함
404년  대방()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전멸함
405년  요동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6년
 목저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10년  동부여를 통합함
412년
 광개토대왕 죽음

 

▲ 광개토대왕 묘실 내부는 텅 비워있었다. (지저분하고 불결하게 관리하고 있는 모습)

2. 광개토대왕비

▲ 광개토대왕비 세부 위치도 (적색 부분)

광개토왕비 비문 관련 (동영상 3편)/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광개토왕비 비문관련

▲ 광개토대왕 비문 (비석 전, 후, 좌, 우의 전체 글씨)

 ▲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의 성립, 형성, 광개토 대황의 업적이 기록되어있고예서의 일종인

    호태체로 새겨져 있다. (탁본 임)

▲ 세월의 풍파로 글씨가 많이 훼손되어 이를 보호 차원에서 비각을 세운 모습

 ▲ 능들을 제외하곤 비와 주변시설들은 깔끔하게 잘 정리 유지하고 있었다. 

▲ 잃어버린 우리 땅 간도지방 탐방길에 나선 老宿者 외 일행들

3. 동방의 피라미드 : 장군총/장수왕릉 (長壽王陵)

집안시에서 동북쪽으로 4.5km 떨어진 용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광개토대왕비와 1km1km 거리에 있다. 대략 5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 (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 (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 한다. 즉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장군총은 화강암의 표면을 정성 들여 가공한 절석(切石)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의 전형이다. 묘 밑부분의 한 변의 길이는 31.58m이고, 지면은 면적 960, 지붕면적은 270㎡이다.

현실의 형태는 한 변의 길이가 각각 5.5m, 네 벽은 각각 6층으로6 쌓았고, 천장 부근에는 큰 돌로 기둥을 삼았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 둘레에 너비 30m의 역석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壇)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으며 제1 방단은 4단이지만 제2 방단에서부터 윗부분은 3단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2.4미터, 제1 방단의 한 변은 약 31.58미터, 제일 위의 제7 방단의7 한 변은 약 15미터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 선상 (方位線上)에 놓여있으며 제1 방단의1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 (가장 큰 것의 너비는 약 2.7미터, 길이는 4.5미터 )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제3 방단의3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5 방단의5 서남면에 연도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미터, 높이 또한 약 5.5미터이다.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 올리고 네 벽의 윗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단의 방주형 (方柱形) 평행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 천장이다.그리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미터, 너비 2.6미터, 높이 약 2.6미터이다.

널방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이 있는 구식이며 2개의 널 받침이 있다. 5단 중앙의 구멍을 통해 길이와 너비가 각각 5m, 높이가 5.5m인 공간에 직사각형 석관 두 개가 안치되어 있고 피라미드 정상부는 잘 다듬은 약 50t의 거대한 돌로 덮여 있다. 내부에는 두 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고 이전에 현실 천장에서 평기와 등 많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현실은 오래전에 도굴되고 현실 내 남아있는 유물들은 거의 없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발견되었고 피라미드의 위와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이 발견된 바 있다. 또 맨 위 정상부 동남쪽에서 여러 장의 판석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주춧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로 보아 피라미드 위에 원래는 어떤 건축물을 일종의 능묘 위에 세우는 사당 (陵上廟)과 같은 성격의 이른바 향당 (享堂)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장군총을 둘러싼 12개의 자연석(護石)과 주변에 배총(陪塚)이라 하여 이집트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있다. 호석은 십이지신 상의 기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배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한 학설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05년 일본인 학자에의 조사되어 일본인 학자에 의해 학계에 알려진 장군총은 현재 외형이 거의 보존되어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석릉(石陵)이다. 이러한 돌무지 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수도이었던 연변 집안에 있는, 일명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장군총은 집안 지역에서 가장 특출하게 돋보이는 반듯한 피라미드로 인하여 만주 전역을 휘어잡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의 비석으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고, 광개토대왕의 비석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적석총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라는 의미의 명문 (銘文) 벽돌이 출토되고, 무덤의 크기도 이 장군총에 비하여 4배나 되어 오히려 난잡하고 흉물스러운 적석총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여기기도 한다. 현지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 장군총 (장수왕릉) 전경 <묘 위에 사람을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 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 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基壇)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 둘레에 너비 30m의 역석(礫石)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널방[墓室]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天障石)이 있는 굴식[橫穴式]이며, 2개의 널 받침[棺臺]이 있다

돌무지 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장수왕()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현지 중국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 전시관에서 입수한 예전의 모습들

4. 산 위의 굴뚝이 북한의 제련소 (광개토대왕비에서 가깝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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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을 규탄한다.

자연사랑은 어린이들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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