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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아우슈비츠(Auschwitz)

썬라이즈 2022. 2. 4.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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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이 아이들 미래입니다.

충격적입니다.

아우슈비츠(Auschwitz)

유태인 강제 수용소 및 학살장소

Poland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수용소이며, 폴란드의 오슈비엥침(옛 이름 아우슈비츠)에 있는 옛 수용소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1941년 소련 침공 시, 하인리 히틀러는 SS특별행동부대(SS Einsatzgruppen)을 편성하여 국방군의 뒤를 따라 각종 처형 임무에 투입하였다.

이들이 처형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정치장교, 공산청년동맹 소속 공산주의계 청년 들로서 처형 방법은 직접 총살이었다. 그러나 처형 속도와 탄약 문제가 심각했으며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한 S트럭이었으나 불결한 결과로 인해 처형 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다시 기존 강제수용소와 S트럭에서 사용한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가 독가스를 이용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이다.

위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약 300km 크라카우에서 서쪽으로 약 61km 떨어진 곳이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태인, 로마인, 옛 소련군 포로, 정신질환 가진 정신장애인, 동성애자, 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바우케나우에 제 2 수용소 건설

나치는 아우슈비츠( 정확한 지명은 폴란드의 오슈비엥침 Oswiecim)의 유태인 제1 수용소가 수용인원이 넘치자 아우슈비츠제1수용소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독일식 표기는 비르케나우 BIRKENAU) 마을에 아우슈비츠의 제 1 유태인 수용소보다 약 20배 정도 큰 규모의 제2의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를 만들게 된다. 이곳에는 2,000명씩 들어가는 독 가스실이 4개로 15분이면 8,000명이 질식사하고 30분이면 전부 소각할 수 있는 규모의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보게 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은 브제징카 제2 유태인 수용소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의 입구는 "죽음의 문"이라고 불렀으며 열차노선이 끝나는 부분에 "국제 위령비"가 있다.

제1 수용소 AUSCHWITZ I

제2 수용소 BIRKENAU 2 (AUSCHWITZ II) : 제1 수용소의 10~20배 크기

제1,2,3 수용소 위치 요도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1월 27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AUSCHWIT I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입구의 철문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 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기만적인 나치의 슬로건이 새겨져 있다.

희생자 수

옛 소련군의 발표에 의하면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 약 400만 명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 민족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다

박물관과 전시관 매표소

제1수용소 건물들은 빨간 벽돌 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박물관 사무소 건물

제1수용소 건물들은 빨간 벽돌건물들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잘 보존되고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비초소 속에는 비상시 울릴(타종) 수 있는 종이 설치되어 있다.

붉은 벽돌로 된수용소 건물들...

이중 전기 철조망

탈주를 못하게 이중 전기 철조망으로 붉은 벽돌로 된 수용소를 감싸고 있다.

제1수용소 건물들은 빨간 벽돌 건물들로 되어 있다.

붉은 벽돌 건물은 모두 28동이 있었는데, 수용 인원의 거처와 작업장 등으로 쓰였고, 지금은 일부만이 관광객을 위한 교육장으로 쓰고 있었다.

약 1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박물관에 있는 추모비

모든 관람객들이 이 앞에서 머리 숙여 묵념하고 간다.

독가스통

그 유명한 나치가 개발한,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라는 가스였다.

이 독 가스 한통으로 400명을 독살시킬 수 있는 가스통들이 쌓여 있다.

살해되기 직전에 남긴 유품들

이들의 옷과 신발, 가방, 안경 등.......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군용 모포를 만들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 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었다.

당시 지리적인 근접성으로 소련군이 먼저 폴란드에 들어왔을 때,

발견된 여자 머리카락이 3톤이었고 보통은 6~7톤씩 있었단다.

독일군은 이 머리카락으로 군용 모포를 만들어 각 군부대에 보급했다고 한다.

군용 모포를 만들기 위하여 쌓아 놓은 머리카락들..

군용 모포를 짜다 남은 머리카락

전시실 각 방에는 이 머리카락 말고도 고급 가죽신발, 살림도구, 안경, 옷가지 주소가 적힌 가방 등등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었는데, 그 당시 유태인들이 얼마나 잘 살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독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 놓은 안경들

회수한 구두 솔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샤워장으로 들어간다고

거짓말을 하여 벗어 놓게 한 의수와 의족들

수용소에 오면서 가지고 온 여행용 가방을 회수하여 모아 놓았다.

수용소에서 입었던 옷들

너무나 빈약한 한 끼의 식사

주림에 시달리면서 죽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식사하는 모습의 조각상

수용소 내에 조장의 수감 방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많은 수감자들이 생활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 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 명이며, 이중 7만 5천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총살의 벽

아우 슈 비쥬 제10 블록과 11 블록 사이에 벽으로 이 앞에서 수 천명이 총살당했다.

교수대

독 가스실 입구 오른쪽에

"루돌프 헤스"라는 아우 슈 비츠 수용소 소장을 처형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사형장...

그러나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목을 매어 숨을 멈추게 해서 죽인 교수대로 여기서도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독 가스실 요도

나치의 악랄한 명성을 떨쳤던 독 가스실의 그림이다.

그때 죽음의 독 가스실 앞에는,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샤워장으로 위장하기 위하여이 세척실이라고 쓰여 있었고, 입구에서 2인당 비누 한 개씩을 나누어 줌으로써 모두들 샤워장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독 가스실 입구

원래는 폴란드군의 시신 안치소였던 것을 독일군이 가스실과 시신 화장 소로 개조하였다.

양쪽 뚝은 가스가 새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독일군이 흙을 덮었다고 한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 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라는 가스였다.

독 가스실 내부의 추모 꽃다발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시설 중 독 가스실로서 관광객들이 머리 숙여 애도를 표하고 지나간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아우슈비츠의 만행이 첫 학살이었다.

이 독 가스실은 1회 400명을 질식사시킬 수 있는 시설이다.

이후 수용소 내에서 죽은 전체 인원은, 유대인 150만 명을 포함해 600만이라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유대인이 300만 명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시설규모나 시간으로 보아 학자들 사이에서는 150만 명이라는 것이 유력하단다.

시체 소각장 전경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소각로 앞부분에 화로가 있어 시신을 세 겹으로 쌓은 후 한 번에 200명 정도씩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다.

경 악~~~~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곳이다.

사진은 박물관 직원에게 양해를 얻어 그 참상의 자료들의 일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관광객 모두는 머리를 숙이고 어두운 마음으로 관광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Oswieecim 기차역 앞 정원, 그 옛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 모셔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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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행태와 망언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이젠 우리가

대한민국이

일본을 굴복시킬 것이다.

까불면...

국물도 없다.

자연사랑은

어린이들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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