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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

썬라이즈 2022. 5. 27.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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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랑은 아이들 미래입니다.

피로 쓴 신화, 백마고지 전투

6ㆍ25 전쟁은 끝을 맺지 못한 전쟁입니다.

국토는 전쟁 이전처럼 계속 분단된 상태고, 북의 계속되는 도발로 인해 이전보다 더 팽팽히 대치중인 상태입니다. 정확하게 3년 1개월 2일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6ㆍ25전쟁은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년이 넘는 시간, 이 전쟁을 분석해 보면 군사적으로 가장 극적인 전투가 벌어진 순간은 전쟁 초기 1년간뿐이었습니다.

[6ㆍ25 전쟁은 초기 1년간 극적인 작전이 모두 벌어졌다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전쟁이 발발한 지 거의 1년이 되는 1951년 5월 말의 중공군 제6차 공세 이후부터 휴전까지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전쟁 초기 1년 동안 서울의 주인이 무려 4번이나 바뀌었을 만큼 남북으로 무려 2,300여 킬로미터를 쉴 새 없이 오르내렸지만, 나머지 2년 동안은 겨우 50여 킬로미터 정도를 밀고 당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전쟁 종결에 대한 목표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이 남침을 개시하여 낙동강까지 밀어붙였을 때, 우리가 반격에 나서 한만 국경까지 달려갔을 때, 그리고 중공군이 참전하여 무려 여섯 차례의 대공세를 연이어 계속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피아 모두는 전쟁을 자신의 승리로 종결 짖겠다는 의지가 강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쟁을 벌어진 이상 당연한 이치였고, 그렇기 때문에 승기를 잡았을 때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켜 끝장을 보려 하였던 것입니다.

[피아 모두 승기를 잡았을 때 상대를 완전히 굴복시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1951년 6월이 되자, 어느덧 전쟁을 주도하던 미국과 중국 모두는 승리에 대한 집념을 내려놓았습니다. 최초 세 차례의 공세에서 아군을 매몰차게 몰아붙여 재미를 보았던 중공군도 이후 1951년 봄에 연이어 벌인 일련의 공세에 실패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자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유엔군의 화력을 이길 수는 없다고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온 미군도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중공군에게 어이없이 무너졌었지만, 중공군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한 이후 유엔군은 눈앞에 개미떼처럼 밀려오는 적들이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돌적이었던 밴 플리트(Van Fleet) 신임 미 8군 사령관은 북으로 내달리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공세를 허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1951년 후반기에 유엔군이 북진을 개시하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군이 주도권을 다시 잡았지만 그렇다고 공세를 펼치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지난가을 북진 당시에 유엔이나 미 행정부는 그 한계선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로 보았습니다. 유엔군 입장에서는 국경선까지 진격하여 적을 소탕하면 원론적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 내려온 중공군은 엄연히 교전 대상이었는데 단지 이들을 만주로 몰아낸다고 과연 중국이 전쟁을 포기할 것인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유엔군 입장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은 정치적 한계였지만, 참전을 단행한 중공군 입장에서는 단지 하나의 강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만주로 확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이곳까지 진격하여도 전쟁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따라서 정치 외교적으로 종전을 이루지 못하는 한, 군사적 공세로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할 가능성이 컸고, 때문에 군사적으로 우위에 섰음에도 재 북진을 주저한 것입니다.

[전쟁은 성격이 바뀌면서 고지전으로 변하였습니다.]

결국 중국도 미국도 전쟁을 일방의 승리로 끝낼 수 없다고 판단이 서자, 지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전선이 형성된 바로 지금, 휴전을 하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었습니다. 결국 회담은 시작되었고, 그러다 보니 전쟁의 목표는 휴전 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6ㆍ25 전쟁 후반기를 상징하는 고지전이 개시된 것입니다. 

고지전은 공격보다 방어나 현 전선 유지를 목표로 하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전쟁 후반기가 고지전으로 일관하였다는 것은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양측이 워낙 팽팽히 대치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내가 이겼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휴전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이 되어 거의 6개월 이상 전선의 변동이 없자 암묵적으로 이쯤에서 휴전을 하는 것이 피차에게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지전은 휴전을 염두에 둔 전투였습니다.]

때문에 전투도 휴전선이 그어졌을 때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상대를 감시하기 쉬운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그렇다 보니 이전에 이름조차 없던 무수한 무명의 산봉우리조차 격전의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전쟁 첫해와 같은 인상적인 전선의 이동과 거대한 작전이 없었음에도 불과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발생하는 사상자는 오히려 급증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아군이건 적군이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 참호를 깊게 파서 상대의 공격을 막았고 반대로 고지를 빼앗기면 다시 찾기 위해 어떠한 시도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결국 좋은 위치를 선점한 상태로 휴전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고지전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피를 받쳐 싸웠던 자존심 때문이라도 내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경쟁에서 결코 발을 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영화 '고지전' 스틸컷)]

당시 전선의 중앙인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무명의 395 고지는 특히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연일 혈전이 계속되던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에서 이 고지가 서남쪽 꼭짓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이 연속하여 하늘과 맞닿은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 국군의 전설이 피로 쓰여지게 됩니다.

395 고지를 아군이 점령하더라도 북쪽에는 이곳을 내려다보는 더 높은 고지들이 많아 크게 유리한 측면은 없었지만, 반대로 적이 이곳을 차지하면 철원~김화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를 모두 적에게 내주고 아군은 약 15킬로미터 정도 뒤로 물러나야 하며 중부전선의 주요 통로를 차단당하게 되는 위치였습니다.

예를 들어 북악산을 적이 차지한다면 남산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철원평야 남측에서 바라본 395 고지]

당연히 피아 모두 이곳을 차지하여야 할 충분한 당위성이 있었습니다.

1951년 10월 17일을 기하여 미 제3사단과 교대한 제9사단이 계속하여 395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952년 10월이 되면서 쉽게 타결될 것 같은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전선은 상대에게 더욱 압박을 가하기 위해 격화되었고 395고지 일대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395고지를 공격하려 북쪽 효성산에 3개 師(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제38군이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여타 중공군 부대와 달리 이곳에 투입을 목적으로 오랫동안 후방에서 훈련받았고 화력도 막강하게 편성하여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만큼 적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격전은 예견되었습니다.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이라면 화력이었는데, 문제는 피아가 뒤엉켜 싸우는 고지전에서 화력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395 고지 일대에 참호를 구축한 9사단 병사들]

당연히 병력이 많은 쪽이 우세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인해전술을 펼치는 중공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습니다. 때문에 아군은 반드시 고수할 고지만 선별적으로 확보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필요한 손실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395 고지는 반드시 사수해야 했고 당연히 피를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승리의 관건은 집결한 적을 향하여 화력을 집중시킬 타이밍이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적들이 역곡천을 고의로 범람시켜 아군의 증원을 차단시킨 후, 제30 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395 고지 일대의 진지에 격렬한 포격을 개시하면서 피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포격 후 연이어 개시한 중공군의 3차례 공격을 아군이 모두 격퇴하였지만 병력을 대폭 증강한 적이 너무 지쳐있던 아군을 10월 7일 재차 공격하자 고지가 피탈되었습니다.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습니다.

[ 드디어 적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제28연대가 즉시 반격에 나서 고지를 탈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아군은 최대한 불필요한 사상을 막고 전투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해 순차적으로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군의 희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고 395 고지는아군과 적들이 흘린 피로 뻘겋게 물들어가면서 양측 모두 인명 피해가 급격히 늘어갔습니다.
 전투 개시 불과 3일이 경과하였을 때, 돌아가며 방어와 탈환에 나섰던 제28, 30 연대들은더 이상 전투에 투입되기 곤란할 만큼 출혈이 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적 제113, 114사 또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양측 모두 예비로 아껴두었던 제29연대와 제112사 마저 동원되었고 이들 또한 처절하게 피를 흘려 고지를 적셔갔습니다.

[ 부상당한 9사단 장병들 ]

1952년 10월 6일부터 장장 열흘에 걸친 전투로 무려 12차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의 임자가 바뀌었습니다. 해발 400미터도 되지 않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이 퍼부었던 포탄만 해도 무려 30만 발 정도로 추정되고 하루 동안에 주인이 서로 뒤바뀐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인내심은 중공군을 압도했고 이런 놀라운 9사단의 모습에 중공군은 서서히 질려갔습니다.

결국 10월 15일, 9사단의 놀라운 분투에 중공군은 백기를 던졌습니다.

사실 중공군 38군은 지구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더 이상 투입할 자원도 없었습니다. 고지 주변에서 확인된 중공군 시신만도 1만 4,389 구였는데 이는 38군의 60퍼센트 정도였고 부상자까지 따진다면 38군이 전투를 지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한마디로 무참하게 녹아버린 것이었습니다.

[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을 만큼 중공군의 출혈이 커졌습니다 ]

아군의 피해도 컸습니다. 3,146명의 국군이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전쟁 내내 국군이 하나의 거점을 사수하기 위해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 전투의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중공군이 더 이상은 피를 부어대는 고지전에 매달리지 않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병력을 마구 소모할 줄만 알던 중공군도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국군은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면서 작전 주도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95 고지는 전투 중 실시된 엄청난 포격으로 말미암아 높이가 1미터 정도 낮아졌을 정도로 황폐화됐는데, 능선의 모습이 마치 말 등처럼 생겼다 하여 이후 백마고지로 명명되었고 국군 역사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적 1개 군단을 궤멸시킨 제9사단에게는 백마부대라는 영광된 호칭이 부여되었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

이 글 처음에서 설명한 것처럼 전쟁 중반기 이후부터 벌어진 고지전은 승리로 전쟁을 끝맺겠다는 의지보다는 휴전을 염두에 둔 차선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고 전투가 쉬웠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 지휘부를 당혹하게 만들 만큼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희생을 감추고 지켜낸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었고 그중에서도 백마고지 전투는 자유의 증거라 하겠습니다.

//끝//

P.S. 이로써 ‘생생 6ㆍ25’ 코너에 지난 1여 년간 연재한 ‘6ㆍ25 전쟁 10대 전투사’가 끝났습니다.

본 연재는 관계기관 간행 공간사를 기본으로 최근까지 연구된 자료를 참고하여 집필하였습니다.

군데군데 오타가 있고 생략한 부분도 많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집필자의 능력 부족 때문이며 이 점에 대해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자 합니다.

국방부 아! 6.25  사업 블로그에서 발췌/모셔온 글입니다.

나라사랑/독도사랑

결코 잊어선 안될 6.25입니다.

북한을 옹호하는 중국 등 나라밖 소식에 걱정이 앞서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정치권에 울화가 치민다.  

자연사랑은 어린이들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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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으로 파이팅!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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