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청 조선 원산교구 관할 지도에 간도 포함
2008년 북경올림픽은 동북공정의 결정판
아시아의 역사를 한족(漢族) 문명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그 야망의 종착역은 대한민국 역사를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다. 바로 동북공정의 결정판인 탐원공정과 요하문명 흥기론이다. 할아버지를 바꿔서라도 아시아의 시원(始原)이 되고픈 중국 한족의 뜨거운 욕망과 치밀한 시나리오.
지난 2월 끝난 창춘(長春) 동계 아시안게임은 중국의 메달 욕심이 얼마나 집요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세상이 다 아는 아시아 최강의 스포츠 강국이 점잖게 있어도 1등일 터인데, 마지막 순간까지 독식(獨食)의 식성을 버리지 않았다. 세계를 압도해야 속이 풀리는 중화주의적 메달 공략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가 질렸던 것은 ‘창바이(長白·백두산)여, 영원하라’는 대규모 선전선동이었다. 이는 아시안게임을 스포츠 행사가 아닌 정치 행사로 전락시킨 것이다.
경기 기간 내내 ‘백두산은 중국땅’이란 홍보책자가 창춘 시내를 뒤덮었다. 백두산에서 성화를 채화하고 개회식부터 폐회식까지 37억 아시아인에게 백두산은 중국의 영산(靈山)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댔다.
오죽했으면 운동만 하던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 땅’이란 즉석 퍼포먼스를 했겠는가.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분개하고 있는지 잘 안다. 그런데도 베이징 올림픽의 발판이 될 아시안 게임의 마당에서 굳이 한국인의 성지인 백두산을 의도적으로 콕 집어내어 한민족 전체에 대한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진 1] 도쿄 한국연구원 국경 자료지도 ‘K 1호’ 로마 교황청이 조선의 교구 관할 영역을 표시한 지도. 아래부터 대구교구와 경성교구, 그리고 간도와 함경도를 포함해 1920년 설립된 원산 교구임. 프랑스의 ‘카톨리시즘 앙코레’(1924년)에 실린 축소복사도.
무엇보다 ‘통일 한국’에 간도를 돌려주지 않기 위해서다. 한국에 간도를 돌려준다면 만주를 온전히 지배할 수 없다. 그래서 쟁점을 간도 반환에서 느닷없이 백두산 영유권으로 돌린 것이다.
중국의 한족(漢族) 엘리트들은 한국을 반만년 유목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있으며, 그 뿌리를 뽑기 전에는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만주와 몽골, 그리고 티베트를 얼마나 공들여 뿌리를 뽑고 흔적을 없애 나갔는가. 그럼에도 그 ‘잔당’들이 한국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족 엘리트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참에 유목세계의 마지막 희망인 한국을 한족 문명권으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역사를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동북공정의 결정판인 탐원공정(探源工程)과 요하문명(遼河文明) 흥기론이다.
이런 주장의 결론은 환부역조(換父逆祖), 즉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북방의 제 민족이 한족 시조인 황제 헌원의 직계 자손이라는 주장이다. 고구려 논쟁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언어도단을 진실로 둔갑시킬 마당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며 그 시발점이 창춘 동계 아시안게임이다.
간도 반환 문제부터 살펴보자. 일본은 1909년 만주를 집어삼킬 욕심으로 청나라에 선뜻 조선의 간도를 떼어줬다. 간도는 대한민국보다 더 큰 영토다(사진 1). 고조선은 물론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고향의 동녘이다. 1107년 윤관 장군의 동북 9성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또 신라의 후손을 자처하며 금과 청을 세운 건주 여진의 자리이자 건주 여진 누르하치 일족과 한 핏줄인 함경도 백성의 땅이다.
굳이 국제법을 따질 것도 없이 누가 보더라도 대한민국이 독립하는 순간 간도가 우리에게 귀속됨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분단을 핑계 삼아 중국은 남의 땅을 강탈했으며, 김일성 정권의 연명을 도운 대가로 백두산마저 절반을 떼어갔다. 어찌 독도와 동해 문제를 이에 비하겠는가.
동티모르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목숨과 수십 년의 세월이 바쳐졌듯 국제사회는 냉엄하다. 예비 초강대국인 중국과 얽힌 문제라 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국제사회는 20세기의 대한민국은 알아도 이전 반만년의 코리아는 생소하다. 국제사회가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인구정책’의 실체
이 때문에 중국은 드러내 놓고 간도를 뛰어넘어 백두산을 ‘창바이’로 확정하려 한다. 어차피 제 땅을 지킬 용기와 배짱도 없는 데다 김정일 정권 문제로 옴짝달싹 못하는 한국의 처지를 잘 알기에 이 참에 유사 이래 한 번도 실효적 지배를 해본 적이 없는 만주와 간도를 중국 한족의 땅으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인구정책’이란 이름으로 식민정책을 펼쳤다. 서간도와 북간도를 자치주에서 자치구로 슬그머니 바꿨고, 그러다가 알량한 자치권마저 조선족에게서 빼앗았다. 그 작업이 완성됐음을 알리는 것이 백두산 공정이다. 어차피 안방까지 들어와 눌러앉아야 사랑채고 별채고 집어삼킨 것이 문제 될 게 없으니까.
이 모든 일을 한민족의 통일 전에 완수해야겠기에 지금 중국 정부는 분주하다. 그런데도 한국엔 이에 괘념치 않는 얼치기 국제주의자나 친중탈미(親中脫美)의 탈을 쓴 신판 모화 주의자(慕華主義者)가 의외로 많다. 한국 내에 이런 기막힌 흐름이 있다는 것을 베이징에서 훤히 꿰고 있기에 이렇게 대담한 도발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간도와 백두산만 중국에 갖다 바친다고 일이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반만년의 역사를 포기하고 중화 연방의 반만년 제후국으로 완전히 들어가야 이 도발은 끝이 난다. 이제 베이징올림픽의 화두가 될 화하 일통(華夏一統)에 대해, 동북공정과 백두산 공정을 넘어 우리를 반만년 제후국으로 만들 요하문명에 대해 알아보자.
베이징올림픽은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에 막이 오른다. 우리가 20년 전 올림픽 개최를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듯 중국도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3억 이웃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잘살아야 우리도 이웃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공존공영의 동아시아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사회주의는 허울일 뿐
그러나 이런 우리의 바람은 어긋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엄연히 반만년을 함께해온 오랜 이웃의 뿌리를 건드리려 한다. 이는 한족의 뿌리 깊은 열등감 때문이다. 유사 이래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명나라를 빼면 중국이 동아시아 대륙은커녕 중원조차 제대로 통치한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수천 년 중화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그들이 열등감을 극복할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유목 세계의 뿌리를 뽑는 것이다. 더 이상 천자의 나라인 중화세계가 ‘천손족’이라 방자하게 칭하는 오랑캐들에게 유린되는 일을 막아야 하고, 그러자면 유목세계의 흔적까지 없애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한족은 1949년 대륙을 석권하자마자 고매한 사회주의 이상은 내팽개치고, 염불만 외고 있던 티베트와 피부색조차 다른 위구르를 짓밟았다. 또 문화혁명의 와중에 몽골과 만주인의 뿌리를 뽑았다.
이것도 모자라 인구정책이란 미명 아래 이민족들을 그 고향에서도 소수민족으로 만드는 과정을 착실히 밟았다. 그 결과 수십 년 만에 13억 인구 중 92%인 12억을 한족으로 만들었다. 나머지 55개 민족을 다 합쳐 고작 8%(1억 명) 짜리 들러리로 만들었다. 어찌 보면 사회주의는 그저 허울일 뿐, 중국을 굳건히 지배한 것은 중화주의였다.
그러던 중 난제에 부딪혔다. 그것은 유목 세계를 이루던 여러 이민족의 유구한 정신세계였다. 반만년 대륙을 호령했던 히타이트와 야율아보기, 그리고 칭기즈칸과 누르하치의 역사가 어디로 가겠는가. 이 대목이 섬뜩한 이야기의 핵심이다. 청나라 만주인이 만들어준 사상 최대의 강역(疆域)을 공짜로 물려받아 동아시아 대륙을 통째로 중국이라 분식(粉飾)하고 그 땅 위에 사는 모든 이를 졸지에 한족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 머릿속의 반만년 정신세계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었다. 명멸을 거듭했던 역대 중원의 왕조처럼 오늘의 중국이 순식간에 조각날지 모를 일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파룬궁(法輪功)을 견문발검(見蚊拔劍)으로 소탕한 한족 엘리트의 뿌리 깊은 열등의식을 이해할 법도 하다. 이렇게 끝없이 분식과 식민을 거듭하며 무리에 무리를 한 것이 오늘날 허상의 중국이자 중화다.
물론 누구든 대국을 거저 얻었으면 그를 밟고 또 밟아 반석처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13억 인구를 이 정도로 먹고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것만으로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을 이해받을 만한 업적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다. 이는 선민사상에 빠진 자들의 공통점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관념 세계에서 해석한 결론을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중화주의가 세상을 석권해야 역사의 정통이 서며,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현실과 비겁하게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 난치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해결의 출발점은 그들의 무모하고도 위험한 도박판을 없애는 일이다. 55개 민족의 역사·문화 전통을 깡그리 말살하고 그를 한족의 역사·문화 전통으로 편입하겠다는 도박, 세계 어디보다 다종 다양한 민족문화가 뒤섞이고 꽃핀 동아시아의 민족 생태계를 고비사막과도 같은 불모지로 만드는 유례없는 반달리즘(문화예술 파괴행위)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중화식 반달리즘은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각개격파의 단계로서 개별 공정인 서북-서남-몽골-베트남 동북공정이다. 둘째는 중화 종통의 수립 단계로 단대 공정(斷代工程)이다. 셋째, 중화민족 재편의 단계로 탐원공정과 요하문명 흥기론이다. 세 단계는 순차적이면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2단계와 3단계는 항공대 우실하 교수 글에서 원용).
대만 다음은 한국 차례?
[사진 2] ‘중국 근대 간사’(中國近代簡史, 1954년)에 실린 중국의 실지(失地) 1949년 건국한 중국이 그 무렵부터 한국을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땅으로 여기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교과서의 일종.
각개격파의 단계는 변방을 중국이라는 다민족 국가의 일원으로 확실히, 그리고 강제로 편입하는 과정이다. 서북공정은 2002년 동북공정과 함께 시작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 아직도 기초과제를 다루고 있다. 그 대상인 위구르는 옛날 돌궐의 땅으로 바로 옆에 혈족인 투르키스탄이 있고 멀리 터키에 이르는 투르크족의 배후가 있다.
특히 위구르는 몽골의 원나라와 만주의 청나라에 지배당한 적은 있지만 한족에게는 한 번도 지배당한 적이 없다. 게다가 외모와 종교는 물론 말과 글이 전혀 다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위구르의 역사를 한족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라고 강변한다.
서남공정은 1986년 덩샤오핑의 지시로 시작된다. 그 대상인 티베트는 한족의 자랑인 당나라 장안을 점령하기도 했다(이 때문에 당나라는 신라까지 삼키려다 676년 황급히 철수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 장 동원론(漢藏同源論)을 내세우며 이 지역이 늘 중국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연개소문만큼이나 송첸캄포(7세기 티베트를 통일한 왕)를 잘 기억하는 그들은 1949년 공산당 정부를 세우자마자 불자로서 평온하게 살아가던 별천지 티베트를 홍 군을 앞세워 학살하고 유린했다. 이제는 칭짱철도(靑藏鐵道)를 놓아 세계인이 감탄하던 청정 불국을 돌이킬 수 없는 사바세계로 만들고 있다.
몽골과 베트남 공정은 최대 영토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약소국 무시의 전형이다. 중국은 1995년 몽골국 통사 3권을 발간하면서 ‘몽골 역시 중국 땅’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중국 정부는 “학술활동이지 정부 공식 의견이 아니다”라며 발뺌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기원 전후 남월(南越)의 수도가 광저우였다. 강제로 뺏은 내몽골 자치구나 광둥성·광시성을 몽골과 베트남이 달라고 할까 봐 선수를 치는 것이다.
결국 ‘서자’ 신세
다음은 동북공정. 이와 관련해서는 동양대 김운회 교수의 글을 읽어보자.
“동북공정이 199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중국 공산당(한족) 정부는 일관되게 한국을 중국의 실지(失地·잃어버린 영토)로 파악한다.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6·25 전쟁 개입은 한족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북공정은 사실상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부터 시작됐다. ‘중국 근대 간사’에 실린 지도(사진 2)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17개 지역이 원래 중국 영토였는데,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해 실지가 되었으므로 이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근대 간사는 중국 정부의 주장을 반영한 교과서의 일종인데, 그 책의 주장대로라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다만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대만이 중국령이 되면 다음 차례는 한국이다. 그런데 이미 대만이 중국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도 상당히 위태롭다.
현재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나 발해사의 편입이지만, 길게 보면 백제 공정과 신라 공정이 줄을 이을 것이다. 실제 중국은 최근 대대적인 양쯔강 발굴사업을 통해 한반도나 일본의 벼농사 기원을 연결하려 하고 있다(일본 ‘문예춘추’ 2005년 4월호 ‘長江文明發堀記座談’).
그런데 재미있게도 중국의 실지에 일본은 빠져 있다. 중국에 보낸 조공이라면 일본도 만만찮은데 중국은 아마도 일본에 대해서는 다소 주눅이 든 듯하다. 하기야 센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이웃에게는 끝없이 사나운 것이 한족이다.”
둘째는 중화 종통을 수립하는 단계, 즉 단대 공정이다. 각개격파의 과정을 통해 최대 영토주의를 달성하고 55개 민족을 중국이란 ‘통일적 다민족 국가’에 강제 편입했다면, 그 안에서 서열을 매겨 누가 적통이고 누가 서자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중화 대가정’을 이룬다고 그것이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 될 것 같은가. 중화주의의 기초를 닦은 한(漢) 나라 동중서의 종법제처럼 집안의 엄격한 질서를 세우자는 것이 본심이다.
이전에 화하의 중화가 있고 주변은 모두 남만-서융-동이-북적의 오랑캐로서 불구대천의 이질적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중화의 한족을 중심으로 불상용(不相容)에서 신분질서가 엄격한 상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화이관(華夷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사 도로아미타불’
[사진 3] 중화 삼조당 왼쪽부터 치우, 헌원, 신농. 신화의 세계에서 판천대전의 패배로 볼모로 잡힌 신농과 탁록 벌판에서 잡아 죽여 그 시신까지 사방에 흩뜨렸다는 치우천황까지 졸지에 헌원과 함께 중화의 조상으로 둔갑했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산시(山西) 성에서 산시(陝西) 성까지 샅샅이 뒤지며 전설의 나라인 하나라를 실재한 것처럼 둔갑시켰다. 이전에 그들이 오랑캐 동이의 나라이자 주나라의 건국을 천명이라 했던 상나라(殷)와 주나라까지 이음으로써 하-상-주 시대를 중화 적통의 발현으로 승격했다. 아울러 그 시기를 기원전 841년에서 졸지에 기원전 2070년으로 끌어올렸다.
대한민국에서 단군조선의 실재와 관련, 역사교과서에서 ‘(단군이) 건국하였다고 한다’에서 ‘건국하였다’고 한 줄을 바꾸는 데 반세기가 걸렸는데, 이들은 순식간에 1229년을 끌어올리고 그 무렵부터 중화문명의 광휘가 비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화 대가정을 이루는 55개 들러리 민족은 비록 중화문명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서자라는 얘기다. 하-상-주 단대 공정에 따르면 기원전 2070년부터 지난 4000년 중화의 교화 아래 차츰 문명화한, 그렇게 구원받은 민족이란 것이다. 어이없지만 이것이 중화식 종법제를 근간으로 한 현대판 화이관의 ‘만들어진 역사’, 하-상-주 단대 공정의 실체다.
그러나 베이징올림픽을 1년 앞둔 우리는 앞서의 개별 공정이나 단대 공정보다 더욱 가공할 도발에 직면해 있다. 이는 인위의 극치인 중화민족의 재편이며 그 도구가 곧 탐원공정과 요하문명 흥기론이다.
베이징에서 서북 쪽으로 4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허베이(河北) 성 탁록이 나온다. 이곳에 중화 삼조당이 있다. 한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 황제 헌원과 오랑캐의 수장으로 알려졌던 염제 신농, 그리고 한족이 미워하던 치우까지 한족의 공동 조상으로 모셔놓았다(사진 3). 베이징올림픽의 성화는 이곳에서 내내 활활 타오를 것이다.
중국은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한나라부터 2200년 동안 불구대천의 오랑캐라 여겼던 남만-서융-동이-북적까지 중화민족임을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시킬 것이다. 신농과 치우를 헌원과 함께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모시고 있음을 거듭 보여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미 한족은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의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신농이야 그렇다 치고 한족이 저주를 퍼부었던 치우까지 그들의 조상이라니 한족 엘리트의 자존심으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는 황하문명의 근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 중화문명의 뿌리를 다시 캐는 탐원공정을 부랴부랴 시작하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1973년 양자강 하류의 하모도 유적에서 이전의 황하문명보다 10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가는 거대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다. 연달아 1980년대 말 이후에 소하서를 비롯한 랴오허(遼河) 일대에 그보다도 1500년이나 앞서는 기원전 6500년경 국가 단계로까지 진입했다고 추측할 만한 ‘문명화된’ 신석기 유적이 대거 발굴됐다.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이쯤 되면 만사 도로아미타불이다. 한족의 처지에서 아무리 55개 민족의 땅을 억지로 빼앗고 그 역사를 하-상-주에 따르는 주변부 문화로 규정해봐야 헛수고다.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이 황하가 아니라 진·한대 이전 남만의 무대였던 양쯔강 하류이거나 그보다 더 적대 관계였던 유목사회, 즉 동이와 북적의 본거지인 랴오허 일대라면 중화문명의 원조는 결국 예맥의 유목민 계통이고 한족은 그 문명의 혜택을 받은 후계자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1980년대 들어 신농을 공동 조상으로 끌어안고 ‘한족은 염 황지 손(炎黃之孫)’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랴오허 일대의 시원 문명이 드러난 뒤로는 급기야 치우까지 중화의 3 조상으로 일거에 격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논리의 모순이 생긴다. 아무리 공동 조상이라 한들 오랑캐들과 승부를 다투고 대부분 오랑캐가 중원을 지배한 역사는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랑캐의 개념을 없애버렸다. 더 이상 동이-서융-남만-북적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 옛날 한족 만고의 충신 악비가 울고 갈 만큼 모든 것이 중화의 내전일 뿐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이란 억지를 쓰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단대 공정의 통사로서의 확장이다. 적서(嫡庶)의 차이가 있을 뿐 유사 이래로 하나의 중화문명이란 억지를 쓰게 된 것이다.
패자(覇者) 되려고 족보 위조?
중화 삼조당 추와 탁록대전 벽화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며 한족도 인정했던 철기문화의 선구자 치우천황을 졸지에 돌도끼를 든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등 억지를 부리다 곳곳에 논리의 허점을 노출했다.
하지만 억지를 써도 문제는 남는다. 아무리 한 문명이었다 한들 예맥은 예맥이기 때문이다. 엄연히 다른 문명의 맥락 위에 있는 대한민국과 만주인의 역사적 사실을 세탁하려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치우를 공동 조상의 반열에 올려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나온 것이 족보 위조다. 랴오허 일대의 홍산문명을 이끈 예맥이 황제의 후손인 전욱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귀를 맞추기 위해 대륙의 모든 족보를 뜯어고치는 대공사와 그를 믿도록 만드는 세뇌공작을 2000년부터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원래 한족의 뿌리는 스스로 주장하는 바, 화하(華夏)가 아닌가. 그런데 이를 둘로 쪼개어 중원의 한족은 원래 화하가 아닌 화족이고, 발해만부터 산둥반도를 거쳐 양쯔강까지 대륙 연안의 동이족은 하족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해 만주 일대의 동이와 북적은 황제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중화의 3대 조상을 이은 중화의 3대 집단이다. 치우는 동이가 아닌 가족의 선조로 둔갑했고, 신농은 중원을 중심으로 한 화족의 선조로 옮겼다. 우리를 비롯한 동이와 북적은 황공하옵게도(?) 황제의 직계 자손으로, 그래서 가장 서열이 높은 집단으로 편입됐다.
아무리 한족이 전 세계의 패자가 되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을까 싶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정설이다. 한족 중에도 우리처럼 양식이 있고 식견이 탁월한 학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럼에도 정부에서 검은 고양이를 흰 고양이라 하면 흰 고양이가 되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면 말이 되는 것이다.
지난해 6월부터 랴오닝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곳에 가보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전 세계를 향해 펼쳐 보일 중화민족의 ‘위조 족보’가 다 나온다. 이를 통해 중국은 황제의 직계 후손들이 이제 제 고향을 제대로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앞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공동의 3 조상을 모시며,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류사회에서 중화의 찬란한 문명을 건설해 나가자고 웅변할 것이다. 그것이 랴오닝성 박물관 상설 전시전의 주제이자 베이징올림픽의 주제가 될 화하 일통이다.
이렇게 되면 지난 반만년 역사의 진실과 학문이 사라진다. 단군과 칭기즈 칸이 졸지에 황제의 후예로 전락한다. 베이징 올림픽 기간 중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공산당 한족의 엘리트들이 마침내 수천 년의 숙원을 이루고 유목 세계를 영원히 평정했다고 중화 삼조당에 제(祭)를 올리면, 거기 억지로 끌려와 앉혀진 치우와 8000만 대한민국인, 그리고 800만 몽골인과 숨죽여 지내는 만주인은 뭐가 될까.
연개소문 자식들의 내분
우리 사학계의 고충을 이해한다. 역사는 사료와 유물로 말해야 하는데 재야 사학자라고 주장하면서 민족사의 시원과 유래를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곤혹스럽겠는가. 그러나 한국의 사학계는 제발 중국이 던져주는 논쟁거리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공과 책봉이 어떻고, 발해의 민족 구성이 어떻고 떠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단대 공정, 탐원공정, 요하 문명론 등 말도 되지 않는 중국 측의 관제 역사학을 깨뜨려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바깥의 적보다도 안의 내분이 더 무서운 법이다. 천하의 연개소문이 다스리던 고구려가 어떻게 무너졌는가. 그 자식들의 내분이 아니었으면 역사의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갔을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동아시아 역사의 진실과 학문을 잿더미로 만들며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수많은 동아시아인의 족보를 바꾸는 환부역조의 만행을, 진시황보다 더한 21세 기판 분서갱유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학계에서 이 일을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재 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열께서 말했듯 나라를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잃으면 민족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우리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내선일체란 미명 하에 역사와 문화는 물론, 말과 글, 그리고 성씨와 이름까지 사라질 뻔했던 위기를 겪지 않았는가. 지금 한족에게 핍박받는 55개 민족이 고립무원의 벼랑에서 반세기 넘도록 그와 같은 고통을 처절히 겪고 있다.
수와 당의 100년 전쟁에서 유목 세계를 지켜내는 방파제 노릇을 고구려가 했듯이 오늘 그 일을 해낼 주체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한국과 중국이, 그를 둘러싼 수많은 민족이 공존공영하는 세계의 창조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베이징올림픽을 희망의 제전으로 만들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다.
출처, 기타, 대쥬신을 찾아서- 해냄출판사 김운회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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