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와 교육

25현 가야금과 병창에 관하여

썬라이즈 2022. 7. 10. 18:03
728x90
반응형

728x90

자연사랑은 아이들 미래입니다.

역사적 토우들

 우리 가락이 좋습니다.

25현 가야금과 병창/이 좋다는 분들입니다.

박범훈 / 25현 가야금과 병창을 위한 가야 송

박범훈 朴範薰. 1948 4 12 ~

25현 가야금과 병창을 위한 가야 송 2.3악장
숙명가야금연주단, 김일륜 25현 가야금/음원이 없어 아쉽습니다.

실 소리 바람에 실려 하늘의 가나
     바람소리 실에 감겨 땅으로 오나

     외로움 서러움 가슴 아픈 마음
     세월에 실어 하늘을 빈다

     열두 달 긴긴 세월 탑을 세우고
     열두 줄 연연히 정을 돋우면
     그믐달 달빛 속에 일렁이는 눈빛 사랑

     실 소리 바람에 실어 보내고
     바람소리 실 안으로 끌어들여
     가야금의 마음을 노래 불러--

     에 -- 가야 송 노래불러 가야송
     실 소리 바람에 실어 하늘을 가나
     바람소리 실에 감겨 땅으로 오나

     나~ 나~ 노래불러 가야송 노래불러 가야송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돈이나 승진, 출세 등 막연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유보하며 부산을 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먼 달리기 시합을 멈추고 오랜 시간을 생각하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이유도 모른 채 바쁘기만 한 생활을” 그만두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전통문화’에 열중하는 것도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을 통해 다듬어진 전통문화에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그래서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는 생태적 삶의 자세가 배어 있는 것입니다. 요란한 성공은 반드시 그만큼 요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근대 서구문화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젤린스키가 강조하는 ‘느린 삶’이 바로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입니다. 사실은 근대화, 자본주의화되기 이전 서구의 삶의 모습도 이것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은 전통에 뿌리는 둔 음악 하나 보내드립니다. 전주 출신 김일륜이 연주한 [가야 송](伽倻頌)입니다. 가야 송은 말 그대로 가야금을 기리는 노래입니다. 목정배 씨의 시에 박범훈 씨가 곡을 붙였습니다.

작품 해설

가야 송이란 불교 시인인 목정배 교수(동국대)가 가야금을 위해 시를 쓰고, 박범훈이 작곡한 노래로 연주자가 직접 노래를 부르며 연주할 수 있도록 작곡된 새로운 형태의 가야금 병창곡입니다. 이번 송년음악회의 마지막은 25현 개량 가야금 효시 작품 중 노래와 함께 하는 대표적 가야금 협주곡인 가야 송을 초연 당사자였던 중앙대학교 김일륜 교수의 농익은 노래와 협연으로 들어봅니다. 모두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악장 가야금 연주로 시작해 연주자가 직접 ‘가야 송’ 시를 노래하는 2악장을 지나 흥겨운 자진모리장단으로 이어지는 음악이 마치 가야금의 선율에 배를 띄워 몸을 맡긴 듯 ‘아름다운 풍류 항해’를 느끼게 할 것입니다.

숙명가야금 연주단

숙명가야금 연주단(대표 김일륜)은 1998년에 설립된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의 재학생을 중심으로 1999년에 결성된 국내 최초의 가야금 오케스트라이다. 숙명가야금 연주단원들은 대부분 기성 연주단 및 대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전문 연주가들로 현재의 전통음악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개척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숙명 연주단은 1999년 11월 9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한 이래, 세계지리학회 초청 연주회(2000년 8월 16일), 제2회 숙명가야금 정기 연주회(2000년 10월 17일)등을 비롯한 방송 출연 및 학내·외 행사 초청공연, 그리고 숙명가야금연주단 음반 제1집(2000년 1월) 출반 등의 활동을 펼침으로서 가야금 합주단의 선두그룹으로 자리를 귿히고 있다.

김일륜 1960 ~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풍류를 좋아하여 시 서악(詩書樂)을 즐기던 분이셨는데 김일륜이 일곰 살 되던 해 집 삼층에 사설 국악원들 들임으로써 김일륜이 음악에 입문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일륜은 자연히 집안에 드나드는 음악인들을 마주치게 되었고, 타고난 운명이었는지 그 소리에 빠져들어 자연스럽게 판소리와 가야금을 시작하였다. 김일륜의 어머니는 딸의 예능 소질을 더욱 아끼셨다.

딸의 연습을 도와주는 한편, 딸이 가야금 연습에 소홀히 않을까 염려되어 직접 가야금을 배우는 열성을 보이셨다고 한다. 이렇게 지극한 부모의 사랑과 완벽하리만큼 가꾸어진 조기 교육의 현장에서 음악에 입문한 김일륜의 성장 배경을 보면 그가 고등학교 시절 '전북의 별' 상을 두 번이나 받았 으며, 서울 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한 후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 대학교 4학년 때 한미 수교 백주년 기념 미국 순회 연주회에 솔리스트로 뽑혀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연주회를 갖고 '미스 야금'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은 것 등이 적적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이 무렵 서울 대 학교 이재숙 교수가 김일륜의 잠재된 스타성을 일깨우고, 그의 산조를 넘치거나 흐드러지지 않게 다독이며 '격'을 살려 준 것은 큰 가르침이었다. 김일륜은 졸업 후 당대 민속 음악 명인들의 총집결지인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에 들어가 서용석, 박종선 명인의 음악 세계를 섭렵하는 한편 작고한 명고수 김명환, 가야금 병창의 명 인 박귀희 최옥산류 가야금 산조의 제 일인자 함동정월 명인 등을 사사하면서 음악 세계를 넓혔다. 어릴 때부터 익힌 소리와 뛰어난 가야금 실력을 박귀희 명창은 크게 탐내서 자신의 이수자가 되기를 권유했을 정도이고, 함동정월 명인은 혼미한 정신을 수습해 가면서 김일륜 에게 가야금 산조뿐 아니라 가곡과 시조까지 가르쳐주려 애썼다.

김일륜의 음악 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년남짓 국립국악원 연주단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창작 국악 연주 활동이 잦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자리를 옮겨 10여 년간 다양한 음악의 숲을 원 없이 쏘 다니는 듯 보였다. 그리고 1989년에는 실내악단 '어울 림'에 합류하고, 이듬해에는 한걸음 더 내디녀 박현숙, 김해숙 등의 선배 연주자와 함께 서 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을 창단하여 가야금 음악의 새로운 음향에 도전하였다. 이 무렵 어울림 공연 무대에서 김일륜이 대중 가수처럼 마이크 앞에서 가요풍의 노래를 부 를 때 뭍 청중들은 크게 환호하고...

그의 노래와 가야금 연주가 담긴 음반이 국악계의 스테 디 셀러로 자리매김을 하는 동안 한 편에서는 행여 산조나 시나위 같은 암악에서 들려주던 대단한 솜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지, 이러다가 본격적으로 '다른길'의 스타가 되는 것은 아 닐지 애태우며 지켜보는 눈도 많았다. 대개 그를 애지중지하는 스승들이셨다. 그러나 이 같은 염려가 지나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995년에는 마치 김일륜을 위해 작곡된 것이라 여겨질 만큼 그에게 꼭 어울리는 박범 훈 작곡 <22현>를 초연한 이래 그가 국내 무대에서는 물론 중국, 일본 무대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활약상은 무르익은 김일륜 산조의 멋과 그동안 김일 륜이 섭렵하고 터득한 창작음악 이해력을 단번에 확인시켜준 것이다.

박범훈 朴範薰. 1948 4 12 ~

경기도 양평 출생 중앙대 총장. 호는 ''서민의 소리''라는 뜻을 가진 범성(凡聲). 고향인 경기도 양평의 양평중학교 밴드부에서 서양악기인 트럼펫을 불었었다. 그러나 16세 때 우연히 그 동네를 찾은 남사당패 꼭두쇠(대장) 남운용 선생을 만나 그의 손에 이끌려 한국 국악예술학교(현 서울 국악예고의 전신)에 입학, 피리를 불게 된다. 소년 시절부터 서양악기와 동양 악기를 함께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고향인 경기도 양평의 양평중학교 밴드부에서 서양악기인 트럼펫을 불었었다. 그러나 16세 때 우연히 그 동네를 찾은 남사당패 꼭두쇠(대장) 남운용 선생을 만나 그의 손에 이끌려 한국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고의 전신)에 입학, 피리를 불게된다. 소년시절 부터 서양악기와 동양악기를 함께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고교에서 국악을 하고 대학에서는 서양음악 작곡을 배웠고 다시 일본 무사시노(武藏野) 음대에서 학부. 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 작곡법을 배웠다. 이 과정을 거쳐 그의 음악은 보편성을 띠게 된다. 그가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2002 월드컵 대회 개막곡을 작곡하고 음악 총감독을 맡아 지휘까지 하게 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국의 소리로서 아시아인이 이해하고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적임자였던 셈이다. "국악의 세계화라는 것은 세계 사람들이 국악을 들으면서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제천(壽齊天)은 우리의 훌륭한 궁중음악입니다. 독특한 한국의 것으로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그 음악 그대로는 세계인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는 없지요. 그래서 월드컵 때는 국악관현악단과 서양 오케스트라는 물론 대규모 합창단을 끌어들여 수제천을 했습니다. 대금 연주와 판소리에 바이올린과 대합창, 벨칸토식 노래가 섞이면서 한국의 소리에 외국인도 이해할 수 있는 화음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나 그의 국악 세계화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세계화 이전에 가장 먼저 우리 국민들이 국악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고 아시아인들이 우리의 음악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악교육에 열을 올리고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대중음악 가수도 동원했다. 장사익, 송창식 등이 그가 만든 음악을 불렀다. 특히 마당놀이는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춘풍전'', ''봉이 선달 전'', ''흥부전'', ''홍길동전'', ''놀부전'', ''배비장전'', ''심청전'' 등 11개의 마당놀이 곡이 그의 손에 의해 빚어졌다. 다음 달에는 그가 만든 ''마포 황부자''가 손진책 씨 연출로 장충체육관에서 선을 보인다. "어린 나이에 국악 악기로 민요를 편곡했다가 선생님한테 종아리를 맞기도 했습니다. 국악을 대중화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 대해 반발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서양 음악계에서는 독일의 현대음악을 흉내 내느라 바빴고 국악계에서는 전통, 전통하며 기침 소리까지 닮으라고 하던 시절에 ''돌연변이''가 나타나니까 시끄러웠던 거지요." 비판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그러졌다. 지금은 국악을 서양식 관현악 형식으로 연주하건 재즈그룹과 협연을 하건 많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문화재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국악을 하는 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국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교육을 시킬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어 문제 될 것이 없지요" 박 총장의 주도로 1993년에 만든 아시아 민족악단(오케스트라 아시아)은 국악의 아시아화 노력의 일환이다. "창단 이래 매년 3개국의 악단이 함께 모여 연주를 하고 있지요. 이러한 모임 때문에 우리 전통악기도 많이 개량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오래전 수교를 통해 음악인들끼리 교류가 상당히 진전돼 있어 악기개량도 우리에 비해 훨씬 일찍 이뤄져 왔다. "현대에 들어와 우리 음악의 발달이 늦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장점은 전통음악을 잘 보존해 왔다는 것입니다. 일제 때 판소리를 일본어로 부르도록 강요했음에도 판소리 다섯 바탕이 남았고 중국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궁중에서 연주됐던 음악이 그대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광대. 기생 취급을 받았지만 민요 등 민속음악이 많이 남았고, 노동현장에서 불리었던 노동요 같은 것을 학자들이 많이 발굴해 놓았습니다. 실제 악기개량이라든지 창작음악을 만드는 작업들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입니다." 아시아 민족악단은 올해는 오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도쿄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국악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국악교육의 성과도 많이 나타나고 있어 즐겁긴 하지만 국악의 생활화나 세계화 과정에서 주변에 대해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요즘은 젊은이들이 오디오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영상이 아주 중요하지요. 일본 NHK TV에서는 13시간 계속해서 가부키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 KBS 등을 포함한 TV매체들은 국악 연주를 보여주는데 너무 인색합니다.

그나마 있는 ''국악한마당''이라는 것도 시청자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대에 편성하기도 하고 스포츠 중계가 있다고 하면 아예 안 해 버리는 정도니까요." 정부의 국악 지원에 대해서도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 정부의 정책 수립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386세대들이 대학시절 사물놀이와 민속춤 사위 속에 민주화 투쟁을 했기 때문에 국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섭섭함을 토로한다. "옛 일은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치에 바빠서 그런지 오히려 다른 세대에 비해 더 우리 문화에 대해 소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국악인인 박 총장이 모교의 총장직을 맡을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기간 쌓아온 교육행정 경험과 경영마인드 덕이다. 그는 중앙국악관현악단이나 아시아민족악단 같은 예술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조직의 경영방법을 터득해 왔다.

또 오랜기간 서울 국악예술 중고 이사장을 맡으면서 국악유치원, 국악중학교를 설립했다. 중앙대 법인 처장을 2년간 맡은데 이어 총장이 되기 직전 4년간은 부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교육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축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인이 무슨 총장이냐''는 일각의 비판적 시각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제가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작곡자가 그랬듯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지휘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화합시켜 새로운 음을 만들어 왔습니다. 저는 대학을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봅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연주자들이 화합 분위기 속에 연주를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대학을 그렇게 운영하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대학 구성원들의 마음입니다.

그분들이 마음을 열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지휘만 해주면 좋은 성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합니다." 대학총장으로서의 직무수행과 작곡 활동을 양립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너무 바빠서 작곡활동은 예전처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부총장 때는 그래도 살금살금 했는데 총장이 되고 난 후에는 시간 내기가 무척 힘듭니다. 점심 식사 후 잠깐 쉴 때 조금씩 하지만 그렇게 해 가지고는 안되지요. 주말에 쉬면서 급한 작품 같은 것은 조금씩 손을 봅니다." 다음 달부터 하게 된다는 마당놀이극 ''마포 황부자''도 곧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제게 작곡을 의뢰한 분들이 불평이 많아요. 지난 20년간 작곡을 해주었던 마당놀이 같은 것은 제작자들이 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죠." 그는 한 2년 치 분량의 작곡을 이미 의뢰받은 상태. "작곡가로서 이 정도의 의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일본 음악 작곡가 미키 미노루 선생의 예를 든다. 미키 미노루는 일본 음악집단을 창단한 일본의 대표적 작곡가다. "그분은 제가 총장이 됐는데도 축하도 안 해요. 작곡가가 작곡만 해야지 무슨 총장이냐는 거예요. 작곡이 몇 년 치가 밀렸느냐고 해서 2년치라고 했더니 자기는 10년분이 밀려있다는 겁니다. 80세가 다 된 분이 정말 대단하지요." 박 총장은 다작(多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다작하는 것이 좋죠. 시도 때도 없이 곡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면 먹고살기 위해 곡을 많이 쓴 사람들이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깁니다. 베토벤도 먹고 살기 위해 곡을 쓰지 않았습니까. 고상하고 배부르고 행복한 나머지 큰 걸작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거기 매달린 작곡가 치고 좋은 작품을 남긴 예가 거의 없습니다." 그간 쓴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어느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즉답을 피한 채 그냥 자신이 작곡한 곡은 별로 안 듣는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곡은 다른 사람들이 연주를 할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것인데 연주가 잘 안 된 부분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바람에 신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당놀이 곡이나 88 올림픽 또는 월드컵 대회 개막식 음악은 그가 작곡한 많은 곡들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관현악곡 중에서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한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이나 ''신내림'', ''나나니'', ''춘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곡이다. 그는 기독교를 믿는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는 달리 불교에 심취해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땄다. 그 과정에서 ''보현행원 송'' 같은 불교음악과 특히 찬불가로서 ''가야지'', ''어화 너'', ''찬미의 나라'' 같은 곡들이 탄생했다. "찬불가를 많이 작곡하다 보니까 저를 보고 ''생불''이라면서 합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라며 박 총장은 웃는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지난해 ''박범훈의 음악세계''라는 큰 제목으로 23개 음반이 출반 됐다. 박 총장은 지난해에는 또 ''내가 만난 소리. 내가 만든 소리:소리연(緣)''이라는 제목의 자서전 겸 작품 해설서를 냈다.

^(^, 고마운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응원은 모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긍정의 힘으로 차이팅!

충!

728x90
반응형

'자료와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와왕 설화  (0) 2022.07.11
1970년, 1~12월 생활상입니다.  (0) 2022.07.10
세계의 걸작 모음  (0) 2022.07.09
안중근 의사가 복역한 中 여순 형무소  (0) 2022.07.06
의견 설화(義犬 說話)  (0) 202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