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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울릉도의 역사와 기록

썬라이즈 2022. 1. 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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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한 독도와 울릉도의 역사

(독도의 역사)


독도는 신생대 3기인 460만년 전에 화산폭발로 생긴 34개의 바위섬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독도와 인접한 울릉도에서 찾아낸 유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인 [갈색무늬 토기](승문토기)가 사용된 시기를 기준으로 대략 기원 후 약300년 무렵(서양: 로마시대, 우리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으로 추측되며, 울릉도는 신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으므로 주민들도 신라 동해안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짐작되고 있다.

이러한 독도는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로 이루어진 우산국이 신라 영토에 귀속됨으로써 역사서에 그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게 되었다.

<<< 독도의 연혁>>>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1454년(단종2년)
세종실록중 권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 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 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 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애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 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881년(고종 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 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1905년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연한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해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하고 조난어민 위령비 철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 각서 발송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4월 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 수여.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86년 7월 8일
동인의 사위 조준기(61. 3. 20 생) 주민등록 전입(가족 3명). 6개월간 어로 작업 목적.

1991년
김성도(56세) 외 가족 (1명) 전입(서도)

현재 2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 (동도)

(울릉도의 역사 기록)


청동기시대(기원전 1000~300년) 또는 철기시대 전기 (300년~1년)에 울릉도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함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현포, 남서, 저동리)  
삼국지위지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사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견해가 있음.  

512년 지증왕 13년 신라장군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울릉도가 최초로 문헌에 등장)
930년 고려태조 13년 조공한 우릉도(芋陵島)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함.  
 
1018년 현종 9년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을 폐하게 되어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구를 하사함.
1032년 덕종 원년 우릉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함.  
 
1157년 의종 11년 우릉도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케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함  
 
1379년 우왕 15년 왜구가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케 함.
1417년 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킴.  
 
1614년 광해군 6년 대마도주에게 울릉도(鬱陵島)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냄.  
 
1693년 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 외교분쟁 발생. (안용복 1차 도일)  
 
1694년 숙종 20년 삼척첨사 장한상 울릉도 수토  
 
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일본 백기주(伯耆州)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
(일본인의 출어.벌채금지서계 조선에 전달)  
 
1882년 고종 19년 이규원 검찰사 울릉도 검찰, 울릉도 개척령 반포, 전석규 도장에 임명. (수토정책 철훼)  
 
1883년 울릉도 주민이주 시작(16호 54명)  
 
1895년 고종 32년 삼척영장 겸임 도장제에서 전임도장을 임명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1900년 광무 4년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면서 강원도에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남면과 북면으로 나눔(도감->군수)
 
1906년 광무 10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 (1914년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  
 
1915년 군(郡)제를 폐지하고 제주도와 더불어 도(島)제로 변경, 울도군청(鬱島郡廳)을 울릉도청(鬱陵島廳)으로,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편.(행정, 치안 총괄)  
 
1949년 정부수립 후 울릉군으로 환원. (경상북도 울릉군)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 현재의 1읍2면 체제 구축.
 
2000년 독도리 신설

(을릉도 지명의 유래 등)

울릉도는 무릉, 우릉, 우산,으로 불렸던 섬이다.

10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우루마로 불렀으며1700년대 프랑스인들은 다쥐레(Dagulet)로 기록했다.

이두로 보아야 할 이 한자 표기들의 주류인 울릉과 우릉은 'ㄹ'이 하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우산은 우뫼로 읽힌다. 여기에 일본인들의 우루마 곧 울마를 고려하면 울릉과 우릉의 받침 소리는 'ㅇ' 이 아니라 'ㅁ'이었지 않나 싶다.

우뫼, 울마, 울름, 우름에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우르뫼의 줄임말 울뫼다. 울릉도의 본래 이름은 이렇듯 산에서 온 것이다.(울뫼의 울은 나리분지를 울타리처럼 두른 산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울릉도의 높은산이라고는 성인봉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산 없는 봉이다. 본래 산이었던 것이 봉으로만 이름이 남은 것이다. 이 추론이 맞다면 개관에서 언급한 가설은 여기서 정설로 입증된다.

울릉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랜 유물은 김해식 토기 전통이 약간 남아 있는 조잡한 갈색 승문토기다. 석기나 고인돌은 물론 없다. 이로 볼 때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간 것은 김해식 토기 시대 후기인 1세기쯤으로 추정된다. 울릉도로 추측되는 것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옥저조다.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고구려에 쳐들어온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현도군의 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남옥저(지금의 함남 남부 지역)까지 쫓게 하였다. 거기까지 온 왕기가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느냐고 묻자 그 지방 사람이 "언젠가 풍랑을 만나 동쪽의 한 섬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칠월이면 소녀를 골라 바다에 빠뜨리는 풍습이있다고 들었다" 하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박사는 그섬은 틀림없이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 기록은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우산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부터 보인다. 바로 거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강릉) 주둔군 사령관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 사자를 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는 그 우산국 사람들이 낙동강 동쪽,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 바닷가 지방 출신들이라고 본다. 그랬기에 점령 당시 이사부의 나무 사자 거짓말이 통했다는 것이다(이사부가 거짓말을 할때 통역을 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기록의 문맥으로는 직접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400년 넘게 자취를 감춘 울릉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통일 전야인 태조 13년(930)이다(그동안 울릉도는 정말 태평성대를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백길, 토두라는 우릉도 사람 둘이 공물을 가지고 왕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90년쯤 뒤인 현종 9년(1018)에는 고려 조정에서 동북 여진 해적들의 노략질로 초토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내 주고 13년에는 해적을 패해온 섬사람들을 지금의 경상도 영해 지방에 살 수 있도록 조처하고 있다.

현종 때는 여진 해적의 극성기였다. 1019년에는 그들이 50척이나 되는 배를 이끌고 일본의 규슈 지방까지 내려와 463명을 죽이고 1,230명을 잡아갔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해적들이 포로가 되기도 했는데 그들은 대개 고려인으로서 여진 해적과 싸우다 잡혀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한다(일본 역사책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숙종 2년(1097) 안변도호부의 판관 안증은 원산 앞바다에서 열 척의 해적선과 맞붙어 40명을 죽이고 세 척을 나포했다. 숙종 12년(1107)과 그 이듬해에는 윤관이 동북 여진을 쫓고 거기에 9성을 쌓았다. 근거지를 뺏긴 여진족들은 1115년 하얼빈 부근의 회령 지방으로 옮겨 중원으로 쳐들어간다.

1125년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더니 이태 뒤에는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노른자 황하 유역을 차지한다. 동양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윤관의 일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 사람들의 기록은 이보다 한참 전인 덕종 원년(1032)을 끝으로 끊기고 만다. 해적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현종 13년의 경우처럼 모두 육지로 나와 버렸던 것 같다. 이후 인종 19년(1141)과 의종 11년(1157)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사람이 살 수 있는가 보지만 조사로 그쳤을 뿐이었다.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최중헌이 왕에게 시무 10조를 건의한 1200년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왜구라는 해적들이 몰려왔다. 그리하여 고종 10년(1223)부터 시작되어 조선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할 때까지 196년 동안 500여 회나 쳐들어왔던 그들 때문에 울릉도는 다시 무인지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들어가 사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산것, 갯것이 지천인데다 자유의 땅인 터라 버젓이 살 처지가 안 된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유토피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사람들을 잡아 육지로 끌고 들어오곤 했다. 사람이 있으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 태종 3년(1403)과 13, 14년, 세종 7년(1425)과 20,23년 무렵이었다. 이후 울릉도는 정말 빈 섬이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인들은 저들 마음대로 들어와 나무를 베어가고 고기를 잡아갔다. 심지어는 제나라 땅이라며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래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과 22년에 일본 막부로부터 독도는 조선땅임을 확인받아 이것이 양국 정부간의 공식 협약이 되게 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조정에서는 마침내 공도정책(섬에 사는 것을 불법으로 치는 것)을 버리고 개척령을 발표하여 울릉도의 역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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