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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만리(有情萬里) 41

단야의 유정만리 2권 6화

무룡이 암동으로 돌아온 지 벌써 칠일, 침상 위, 무룡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마치 득도한 스님처럼 평온해 보였다. 다만 암벽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던 서책들이 중구난방으로 꽂혀있었다. 무룡이 서책들을 봤음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마도 한 시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그때서야 부르르 몸을 떨어댄 무룡이 눈을 치떴다. 순간, 눈에서 밝은 빛이 일렁였다가 사라졌다. 강한 빛은 아니었었으나 어느 정도 내공이 증진됐다는 증거였다. “......” 하지만 무룡 자신은 자신에게 엄청난 기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암동에서 갓난아기의 몸으로 천년 설삼(千年雪蔘)과(千年雪蔘) 기인이 만들어 놓은 각종 영약을 그것도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기연으..

단야의 유정만리 2권 5화

소연은 책을 펼쳐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 언저리와 눈가가 파르르 떨었다. ‘할아버지! 지금은 집에 내려갈 수가 없어요. 아직도 놈들이 저를 찾겠다고 난리인가 봐요. 그런데 할아버지, 보퉁이를 잃어버렸으니 어쩌지요. 보퉁이엔 중요한 것이 들어있었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할아버지!’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을 뜬 소연은 책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자 곰팡이 냄새가 났다. 비록 퇴색은 되었으나 등불에 비친 그림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나 같이 선녀가 날개옷을 입고 춤추는 그림들이었다. 그림 밑에는 주해(註解)가 깨알 글씨로 촘촘히 쓰여 있었다. 소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림에 몰입되어 갔다. 선녀의 춤추는 동작은 아주 섬세하고 유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발동작 하나하나에..

단야의 유정만리 2권 4화

2장, 가깝고도 먼 이별 천지봉 일대가 생기로 넘쳐났다. 땅속에서 꿈틀대던 생명들은 기지개를 켜대며 밝은 세상을 먼저 보려고 아우성을 쳤고, 이미 밝은 세상으로 나온 생명들은 따듯한 일광욕을 즐겼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고송 하며 온갖 나무들이 활개를 쳤다. 철쭉은 자랑하듯 붉은 꽃잎을 피워 물고 진달래를 건네다 보고, 분홍꽃망울을 송송히 매달은 진달래는 게눈 뜨고 눈을 흘긴다. 촉촉이 젖은 능선은 불꽃처럼 철쭉꽃이 지천이다. 황의를 입은 한 젊은이가 철쭉꽃 사이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젊은이의 허리엔 손도끼가 매달려 있었고 눈엔 깊은 상념이 어렸다. “소연아! 넌 지금 어디 있니? 이제야 너를 찾아 나섰다. 정말 미안하다. 소연아!” 무룡은 능선에 올라서더니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 하루..

단야의 유정만리 2권 3화

한편, 동굴에 혼자 남은 소연은 멍한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헐렁한 가죽옷이 편해 보였지만, 아니 그냥 철퍼덕 주저앉아 있어도 무방할 터였다. 하지만 사회에 오염되지 않은 소연에게는 그마저도 무리였을 것이었다. “누구--?” 소연은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바짝 긴장했다. “토끼 간을 먹었느냐? 겁먹긴, 자 이것이나 손질해라!” 노인이 불쑥 들어서며 잿빛 토끼를 소연 앞으로 던졌다. “아악!” 소연은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이런, 이런, 그래 가지고 무공을 익힐 수 있겠느냐? 무공을 가리켜 볼까 했더니, 그냥 시중이나 들어라! 그리고 이런 것 손질하는 것도 배워라! 음식은 네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노인은 토끼를 가리키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천태일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오던 ..

단야의 유정만리 2권 2화

노인의 이름은 한철이었다. 개봉성 어느 대상의 아들로 태어난 한철은 어려서부터 개구쟁이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개구쟁이 버릇을 못 버리고 망나니 생활을 계속했다. 한철이 엇나간 데에는 부모인 아버지 책임도 한몫했다. 한철의 아버지인 한 대인은 엄했으며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공부시켜 출세시킬 생각만 했다. 그러나 맏아들인 한철은 아버지 말은 듣지 않고 엇나가더니,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계집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술에 취해 기방에서 밤새 술을 퍼 마셨고, 아버지에게 역정을 들은 날은 아버지에게 반항까지 하게 되었다. 머리가 똑똑했던 한철은 옆에서 공부하는 것을 슬쩍 훔쳐본 것으로도 공부한 자들보다 월등한 차이를 보였었다. 그런 한철이지만 공부엔 취미가 없었는지 공부 소리만 나오면 십리 밖으로 도망..

단야의 유정만리 2권 1화

유정만리(有情萬里) 2권 1장, 운명의 만남 어둠이 깔린 계곡으로 밤안개가 자욱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계곡을 잠식한 밤안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 서서히 능선으로 기어 올라왔다. 수비대 병사처럼 능선에 늘어선 바위들도 밤안개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띄엄띄엄 보초를 서던 나무들은 부들부들 떨다 숨을 죽였다. 만화곡에서 20리쯤 떨어진 험준한 능선이었다. 밤안개에 점령당한 능선은 사위를 분간키 어려운 어둠 속에 묻혔다. 그 어둠 속, 흐릿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무룡아, 난 어떻게 해, 이럴 줄 알았다면 자영이처럼 무공이라도 배워 둘걸,”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기척이 들렸다. 흐릿하게 드러난 물체는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연이었다. 소연은 여인에게 예의범절이 중요하다는 할아버..

단야의 유정만리 1권 24화

자영이 기겁하여 구덩이로 몸을 날렸다. 구덩이엔 끔찍한 몰골의 태궁이 자영을 직시한 채 할 말이 있는 양 입을 씰룩였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할아버지!” “자영아! 미안하다, 너에게는 할 말이 없다. 으--” 태궁의 몰골은 정말이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으며 가슴엔 살점이 뭉텅 뜯겨 나간 것처럼 움푹 파여 있었고 검게 퇴색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한 악취까지 풍겼다. 태궁은 숨이 경각에 달렸는지 연방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할아버지! 죽으면 안 되어요, 제가 잘못... 할아버지! 복수는 제가 하겠어요, 그러니 제 걱정은 마세요, 할아버지--” 자영의 눈에선 한과 독기가 뿜어졌다. ​ “자영아, 소연이를... 무룡이를 도와 주거라...” 태궁은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 “할..

단야의 유정만리 1권 23화

같은 시각이었다. 만화곡엔 수상한 인물들이 들이닥쳤다. 일견해도 예사인물들이 아니란 걸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흑색무복을 날렵하게 차려입은 30여 명의 인물들이 초막 앞에 늘어서서 흉흉한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사나이들은 하나 같이 검을 들고 있었으며 살인수업을 받았는지, 몸에선 날카로운 살기와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 흉흉한 자들이었다. 사나이들 앞엔 노소(老小)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일견 하기에도 노소는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노인은 오 척 단구(短軀)에 청포를 입고 있었으며 짧은 수염과 머리는 붉었다. 게다가 눈까지 뱁새눈인데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청년은 바로 천태일이었다. 초막 안, 태궁과 소연 그리고 자영이 탁자 앞에 앉아있었다. 소연은 겁에 질린 얼..

단야의 유정만리 1권 22화

늦은 밤이었다. 두 개의 등불이 암동(巖洞)을 환하게 밝힌 가운데, 무룡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무룡 앞에는 대략 10권의 서책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막 펼쳤는지 한 권의 서책은 무릎 앞에 펼쳐진 채 놓여있었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전에는 쉽게 익힐 것 같더니, 처음부터 정식으로 익히려니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그러니까? 평생을 익혀도 대성하기가 어렵다고 했구나! 그렇지만 나는 꼭 해내야 한다. 먼저 가전무공(家傳武功)을 익힌 후에 다른 무공들을 섭렵할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 갈무리된 것들은 시간 날 때마다 익히면 될 테고, 우선 경공술인 허공만보를 익히면서 검법을 익히자, 천로검결, 가히 하늘도 놀라게 할 만한 검법이다. 장풍인 풍천장..

단야의 유정만리 1권 21

5장: 태궁의 죽음 ​ ​ 만화곡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낮게 깔렸던 안개가 햇살에 흩어지며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탐스런 꽃송이마다 영롱한 진주들이 방울방울 열렸다. 햇살이 진주들을 보듬자 방울방울 진주들이 부끄러운 듯 꽃송이 속으로 숨어든다. 세상에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이슬을 머금고 활짝 웃던 국화꽃들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치떴다. 국화꽃들은 사뿐사뿐 걸어오는 여인을 넋을 놓고 쳐다본다. 여인은 옅은 보랏빛 장의(長衣)를 입었으며 손에는 작은 대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백옥처럼 깨끗한 이목구비가 가히 선녀의 하강을 보는 듯했다. 산들거리는 미풍에 찰랑찰랑 나부끼는 긴 머리가 더없이 마음을 산란케 했다. “할아버지, 뭐하세요.” “소연이 왔구나, 후우, 공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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