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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나라를 세웠던 졸본 성(오녀산성)
졸본성, 환도성, 국내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기원전 37)에는 주몽이 졸본에 도읍을 정한 경위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주몽은...... 무리와 더불어 卒本川에 이르렀다. 토양이 비옥하고 산하가 際固함을 보고 도읍하려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沸流水 위에 집을 지어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졸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졸본은 <삼국지>에는 흘승골성, 광개토왕 비문에는 沸流谷의 忽本으로 표기되어있으며, 지금의 桓因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졸본천(= 沸流水)은 압록강의 지류인 渾江이라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천도 기사가 있다.
琉璃明王 二十二年(AD 3)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內巖城 (유리명왕 22년 10월, 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내암성을 쌓았다)
山上王 二年(198) 二月, 築丸都城 (산상왕 2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山上王 十三年(209) 冬十月, 移都於丸都 (산상왕 13년 10월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는 AD 3년 유리명왕 때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했으며, 209년 산상왕 때에는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환도성과 국내성은 모두 졸본성의 동쪽, 압록강 중류지역으로, 지금의 集安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지역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유리명왕 대의 천도설과 산상왕 대의 천도설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 고구려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建安年中(196~220년)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으로서 즉위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백성 3만여 호를 이끌고 공손강에게로 가 항복한 후 비류수로 돌아와 거주했으며 항복했던 胡族도 다시 이 이모(산상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 이모는 新國을 만들었는데 금일의 도읍 소재지가 그곳이다. 발기는 결국 요동으로 이사하였고 그 아들만 고구려에 남았다.
금일, 즉 <삼국지> 집필 시(280년경)의 고구려의 도읍 소재지는 환도성이었다. <삼국지>는 발기와 이이모 형제의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형 발기가 요동의 공손강에게 항복한 후 다시 졸본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동생 이 이모(山上王)가 200년 무렵에 集安(환도성)으로 도망하여 새 나라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198년 환도성 축조, 209년 환도성 천도라는 기사와 부합한다. 따라서 고구려가 졸본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한 것은 209년 산상왕 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삼국사기는 고국원왕 12년(342)에 국내성을 축조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 번성기때의 고구려
春二月, 修茸丸都城, 又築國內城 (2월에 환도성의 지붕을 새로 이었으며 또 국내성을 축조했다)
즉 고구려는 198년에 환도성을 쌓은 뒤 209년에 환도성으로 천도하였으며, 342년에는 환도성 아래의 평지에 국내성을 신축한 것이다. 환도성은 戰時에 대비하여 산 위에 축조한 山城이었고 국내성은 평시의 國都로, 평지에 축조한 平城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은 沸流水(지금의 渾江)의 유역이다. 이 ‘비류’는 고대 우리말로, 백제의 소부리(사비), 신라의 서벌(서라벌)의 부리, 벌과 마찬가지로 ‘불’이라고 발음했으며 촌락, 읍락을 뜻한다. ‘불’은 보통 弗, 伐, 火(불), 角(뿔) 등으로 표기되는데 여기서는 ‘沸流’라고 표기한 것이다. 온조의 형 비류의 이름도 '불'에서 나온 말이라고 본다.
그런데 卒本은 광개토왕비문에는 忽本으로 되어있다. 이 忽은 불 또는 골(=고을)을 문자 표기한 것이다. 고구려의 지명에는 ‘홀’로 끝나는 지명이 많다. 임꺽정이 웅거 했던 청석골(양주), 비류가 도읍으로 정했던 미추홀도 고구려(맥계)의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충청도와 접하고 있는 안성의 옛 이름은 나혜홀, 충청도 음성은 잉홀이었다고 하므로 고구려의 맥족은 한강 이남에까지 진출하여 韓族과 섞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忽은 신라 성덕왕 때 ‘城’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集安이 고구려의 정치적 중심지가 된 것은 209년 경 왕족 내부의 대립으로 山上王의 세력이 渾江(비류수)지역을 떠나 여기에 ‘새 나라’를 세우고부터이다. 이곳은 원래 현도군의 郡治가 위치했던 곳으로, 주변 일대에서는 가장 개명된 곳이었다. 환도라는 말 자체가 현도의 異字 표기로, 현도와 환도는 발음이 같았다고 간주된다. 그 후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200년 남짓, 집안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는 영역을 주위에 넓히고 국제적 지위를 높여가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고대 동아시아에 웅비했다.
山上王이 集安으로 남하했을 때, 평야의 중앙에는 한사군 이래의 성곽이 남아있었다. 왕은 이 성곽을 정비함과 동시에 환도산에 山城을 쌓아 기존의 城과 유기적인 연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식 왕도의 경영을 추진했다고 본다. 그 당시 이 城의 이름은 不耐城이었다고 추측된다. 불내의 ‘불’은 촌락. 읍락을 뜻하는 고구려 고유어로, 처음에는 不耐城으로 표기되다가 후세에 국내성이 새로 축조되었을 때 不耐의 ‘不’이 읍락을 뜻하는 ‘國’ 字로 바뀌고 耐가 內로 바뀐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내성은 영흥에 있던 현도군의 郡治 不耐城과는 다른 곳으로, 현도군이 영흥에서 集安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불내성의 이름도 따라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국내성이 一名 不而城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다음과 같이 있다.
正始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余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干丸都之山, 銘不耐之城 246년에 (관구검은)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였고 위궁(동천왕)은 매구로 도망하였다.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이를 쫓게 하여 옥저 천여 리를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환도의 산을 깎아 그 돌로 불내의 성에 戰功을 새겼다.
이 ‘관구검기공비’가 1905년 집안에서 발견되었다. 불내성이 환도산 근처에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평지에 都城을 신축하고 不耐城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문자만 바꾸어 國內城이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國都의 명칭에 모두 이 ‘불’이 들어가 있는 점도 흥미롭다.
342년 국내성이 축조됨과 동시에 그 왕도의 땅 일대는 國內, 國原, 國壤, 國川, 國岡 등으로 불렸다. 국내성의 ‘내’는 川, 壤, 原의 뜻이다. 강이 흐르고 그 유역에 형성되는 땅이 土壤이고 平原이다. 국내의 원 뜻은 ‘압록강변의 땅’인 것이다. 국내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은 고구려의 심장부, 國都가 있는 고구려 근본의 지역, 즉 고구려의 ‘國’으로 의식되었다. 이 國의 地 國內는 왕도가 평양으로 이전한 이후에는 故國, 즉 ‘옛 국내’ ‘옛 國의 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 등의 시호는 옛 국내의 땅(국천, 국원, 국양)에 묻힌 왕이라는 뜻이다.
고국원왕 대에 국내성이 신축되었음은 고구려왕 가운데 ‘國’ 字를 시호를 갖고 있는 그룹이 있다는 것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능묘의 소재지 國內의 '國'을 시호로 하는 왕들로, 제16대 고국원왕부터 제19대 광개토왕까지가 그것이다. 17대 소수림왕은 ‘國’ 字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소수림의 獸林은 ‘수풀’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수풀은 불, 즉 國과 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의 국호 鷄林이 닭+수풀, 즉 닭불의 한자 표기라는 것과 흡사하다. 광개토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역시 '國'字를 포함하고 있다. 고국원왕 대에서 시작되는 이 기간은 국내성이 축조되어 國都로 존속되었던 시기와 딱 일치하는 것이다.
이 국내성으로 상징되는 고구려의 ‘國’시대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85년간 지속되었다. 그동안 고구려는 판도의 확대, 영역 통치의 재정비, 관료제의 진전, 공적 祭祀儀式과 정통적인 왕통관의 확립, 연호. 태왕호의 사용 개시 등 많은 분야에 고구려의 ‘國’ 의식이 강조되는 가운데 왕권의 확대, 국가의 비약적 발전이 실현되어 고구려국은 동아시아에 군림하는 국가로 확립되는 것이다.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 (No.1)
▲ 졸본성(오녀산성) 은 위 적색표시 환인 지역에 있다. (위 적색 현장 탐방기간 2012.8.1~8.6)
▲ 졸본성(오녀산성) 위치도
▲ 졸본성(오녀산성) 세부 위치도
▲ 바로 저곳이 주몽이 나라를 세웠던 졸본성(오녀산성) 이다.
기원전 2-3세기경 고주몽은 비류수가에 나라를 세우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에 나온 이야기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 물의 신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태어난 동명성왕(고주몽)의 신화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신화는 얼토당토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늘에 우뚝 솟아난 바위 절벽 위에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이 있었다. 바로 고주몽이 하늘신 해모수의 자식다운 기상이 흘러나왔다. 졸본성에서 내려다본 비류수(혼강)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의 머릿결처럼 감미롭게 흘러간다. 하늘과 물의 만남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대제국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첫걸음은 이렇게 신비스러운 곳부터 시작되었다.
고구려인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절묘한 입지선정에 있다.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의 안학궁과 대성산성 그리고 졸본성에서 보듯이 천혜의 요새를 확인하고 수도를 세웠던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절묘하게 이용하는 혜안이 고구려인들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었다. 붉디붉은 코스모스처럼....
두 번째는 고구려 사람들은 비류수와 압록강, 송화강 등 물길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사람들이다. 미천왕이 왕이 되기 전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소금을 팔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듯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통해 국가의 물자들을 실어 날았을 것이다. 졸본성에서 바라본 비류수의 물길과 집안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통구하를 보니 더욱 그런 확신을 가지게 했다. 아마 평양의 대동강을 봤어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거야.
세 번째는 신라가 금속공예의 민족이고, 백제가 흙의 민족이라면 고구려는 돌의 민족이다. 집채 만한 돌을 쌓아 올려 장수왕릉을 세웠고 고구려의 수십 개의 성이 아직까지 건재한 것은 고구려인의 돌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적은 병력으로 성에 진을 치고 장기전에 돌입했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쓴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기다릴 줄 아는 국민이었다. 나 같이 성격 급한 사람은 고구려의 피가 덜 들어갔나 보다. ^^
▲ 산성 오르는 입구는 가파르고 좁아서 적의 침투가 어려운 천혜의 요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규탄한다.
▲ 오녀산성 또는 홀승골 성은 중화인민공화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현 오녀산에 위치한 산성으로서,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아 고구려 특유의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수 백여 년 동안 숨겨온 조선의 悲願이 새 세상의 희망과 기운으로 뭉쳐 지각을 뚫고 솟구친 기운 터, 먹장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의 임금인 해모수가 황금마차를 타고 내려와 소중하게 점지한 신령스러운 터. 먼 북쪽의 초원을 떠나 천수백리를 말 타고 달려온 젊은 주몽의 뜻이 활활 불타오르며 고구려라는 횃불로 시대를 밝힌 터. 사그라진 불씨에 희망을 당기며 다시 한번 횃불 밝힐 날을 고대하며...
▲ 고목을 이용한 교량
▲ 활을 쏘기 위한 성곽
▲ 오녀산성 아래 현재의 마을 (고구려 후손 대신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 우리 일행들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 바로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출처, 오른쪽 첫 번째 老宿者/감사합니다.
^(^, 중국의 횡포를 규탄한다.
자연사랑은
어린이들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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